- 보편적 사랑의 내면화
교회가 걸어온 길이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통해 「희망을 만들어온 역사」라고 할 때 정치는 이런 희망을 만드는 하나의 도구로써 역할을 해왔다.
그리스도인들이 정치라는 도구로 세상에 함께 하는 것은 책임의식에 앞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을 따르고자 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택하는 것은 영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회 현실적인 문제이기에 정치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위치에 있다.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주님의 힘이 세상에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의미는 숱한 부당한 선택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상황에서도 보다 보편적인 하느님의 법이 지배하는 사회를 이뤄나가도록 노력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국민들의 삶에 관심이 없는 정치인들의 야합과 그에 편승한 집단들의 이기주의가 판치는 현실 속에서 세상이 불의한 힘에 의해 왜곡된다는 생각만 지니고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적인 삶에 반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 교회의 가르침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거치며 교회는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들의 구원이 요구할 경우에는 정치 질서에 관한 일에 대해서도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일에 있어서 교회는 복음에 일치하고 시대와 환경에 따라 모든 사람의 복지에 부합하는 방법을 모두 또 그 방법만을 사용한다』(「현대 세계의 사목헌장」 제76항)는 사회참여에 대한 원칙을 제시한다. 사목헌장에서 교회는 인권 침해, 고문, 빈부 격차 등 불의를 비판하는 활동을 정치이기 이전에 복음화를 위한 활동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불의한 상황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것은 오히려 지지를 드러내는 정치행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사목헌장은 『정치 공동체의 법적 기초의 설정, 국가의 통치, 위정자 선출 등에 있어서 모든 국민이 아무런 차별 없이, 언제나 더 잘, 능동적으로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효과적인 가능성을 제공하는 법적 정치 구조를 발견하는 일은 인간 본성에 완전히 부합되는 것』(75항)이라고 가르친다.
특히 교회는 『정치 참여 자체는 인간의 존엄성이 요구하는 사항』(지상의 평화 73항)이며 『모든 국민은 공동선의 촉진을 위하여 사용하는 자유 투표의 권리와 의무를 잊지 말아야 한다』(사목헌장 75항)며 유권자로서 정치 참여가 민주주의의 기본이며 신자의 의무이자 권리임을 강조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지난해 10월 교황청을 정기방문한 필리핀 주교단에게 『사회 및 정치 발전을 위협하는 부패의 죄악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고 밝히고 『사회 모든 분야의 복음화, 특별히 정부와 공공 부문에서의 총체적인 복음화 노력을 요청한다』며 부패한 사회를 바꾸는데 적극 나서줄 것을 촉구한 바 있다.
따라서 정의와 평화, 공동선의 증진에 기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임을 재확인하고 정치 참여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 그리스도 정신 구현
17대 총선이라는 건너지 않으면 안 될 물줄기를 앞에 둔 그리스도인들에게 올해는 쉽지만은 않은 또 다른 중요한 선택의 장이 아닐 수 없다.
앞서 지난 2000년 치러진 4?13 총선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바로 「낙선운동」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선거참여 운동이었다. 자질을 갖추지 못한 후보들을 대상으로 낙선운동을 펼침으로써 실제 당락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이 운동은 법적 논쟁 등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만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오던 정치현실을 바꾸는데 큰 몫을 했다.
당시 신자들로 구성된 「천주교 총선연대」는 서울과 수원, 인천 등 전국의 100여개 성당을 중심으로 「부적격자 자진 사퇴와 선거법 개정을 위한 그리스도인 서명운동」을 벌여 3만여명이 참여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또 주교회의 정평위를 비롯해 교회의 여러 공식 기구들도 성명서와 유권자 행동 지침 등을 통해 신자들이 어떻게 선거에 임해야 할 것인지를 당부하고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를 독려하기도 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교회는 최고의 정치 행위라 할 수 있는 선거가 현세 질서의 쇄신과 변화를 위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권리일 뿐만 아니라 공동선 추구와 실현을 위한 도구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 2000년 4.13 총선을 앞두고 「천주교 총선연대」가 출범, 전국의 100여개 성당을 중심으로 「부적격자 자진 사퇴와 선거법 개정을 위한 그리스도인 서명운동」을 벌여 3만여명이 참여하는 성과를 거뒀다.
■ 한국교회의 정치 참여
“교회 대변자를 국회에 보내자”
우리나라에 민주적 제도가 도입된 이래 한국교회는 다양한 형태로 정치에 참여해왔다. 가톨릭 대표를 선거에 내보내는가 하면 범교회적인 지지를 통해 신자 후보의 당선을 이끌어내기도 하고 부정선거에 반대해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1946년 2월 미군정에서 군정 자문기관으로 민주의원을 구성하고, 이를 확대해 12월에 입법의원을 구성할 때 교회는 장면 박사를 비롯한 가톨릭 대표를 추천해 당선시켰다. 또 1948년 5월 10일 제헌의회 선거에 적극 참여해 무소속으로 출마한 장면 등 상당수 신자후보를 당선시키기도 했다.
{{img2}}이렇게 정계에 진출한 신자 정치인들이 앞장서 사유재산권 보호 조항과 혼인의 순결 및 가정의 건강에 관한 국가의 보호 조항 등 가정과 사회의 건강함을 지키기 위한 조항을 헌법에 반영시킨 일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48년에 치러진 5·10 총선거에서는 가장 광범위한 참여가 이뤄졌다. 총선거와 조국의 완전독립이라는 중대한 시국에 직면해있던 당시, 서울교구가 1월 각 본당의 유지 교우들로 「가톨릭 시국대책위원회」를 조직한데 이어 2월에는 서울교구 노기남 주교를 비롯한 5개 교구장이 연합교서를 발표해 중대하고 급박한 사태를 방관하지 말고 나라의 독립과 종교의 평화를 위해 특별히 기도하고 보속을 행하도록 간곡히 권고하기도 했다. 아울러 교회 내 잡지에서도 『우리 가톨릭교회의 대변자를 국회에 보내자』는 제호로 자세한 투표 관련 내용을 소개하는가 하면 『교우들은 마땅히 단결해 투표함으로써 수립되는 정부에 교회적 색채가 반영되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이 선거에서 당선된 장면 박사는 파리에서 개최된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받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후 교회는 1950년 5월 30일에 실시된 제2대 민의원 선거 등에서도 신자를 한 사람이라도 더 당선시키기 위해 꾸준한 노력을 펼쳤다. 1970년대 이후 교회는 군부의 독재로 무의미해진 선거보다는 인권 수호와 정의구현을 위한 적극적 체제 비판과 저항을 통해 정치 참여를 수행함으로써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이루는데 있어 중요한 힘이 되어왔다. 90년대 이후부터는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 등 중요한 시기마다 교회 내 공식 단체나 주교회의 차원에서 금권선거를 반대하고 올바른 선택을 촉구하는 입장을 꾸준히 표명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