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니콜라오 1세(858~867)가 세상을 떠난 뒤 레오 9세가 등장하기까지의 근 200여년간은 교황권이 극도로 쇠약해진 시기였다. 754년에 교황청과 동맹을 맺은 후 로마 교회의 보호자가 된 카롤링거의 프랑크 왕국이 국력이 약화되면서 로마를 둘러싸고 있던 정치 세력들이 교황청을 지배하게 됐다.
유력한 가문들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로마교회를 지배하게 됐고 이들은 자신들의 측근들을 교황으로 선임하고 나중에는 자기 가문에서 교황 요한 11세(931~935)와 요한 12세(955~963)를 선출해 교황직을 장악했다.
요한 12세가 동프랑크 삭소니아의 왕 오토 1세(936~973)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은 것을 계기로 그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축성했지만 오토 1세는 오히려 요한 12세를 폐위하고 자기 측근을 레오 8세 교황으로 임명했다. 게다가 그는 황제의 동의 없이 교황을 선출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로마인들에게 강요했다. 이후 황제들은 그들의 임의대로 교황을 임명하기 시작했고 로마 교회는 정통 교황과 대립 교황의 등장으로 혼란의 시기를 겪다가 1046년에 이르러서야 분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교황 레오 9세(1049~1954)는 즉위하자마자 교회 회의를 소집해 성직 매매로 인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마침내 힐데브란트(Hilderbrand)를 포함한 탁월한 인물들을 교황청에 불러들여 그들의 자문을 들었다. 그가 바로 나중에 교황으로 선출돼 평신도, 즉 세속 군주들의 성직 서임을 금지함으로써 서구 그리스도교를 개혁한 「그레고리오 개혁」의 주인공인 그레고리오 7세였다.
제157대 교황(1073~1085)으로 선출된 그레고리오 7세는 토스카나 지방의 소아나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로마로 간 그는 아벤티노의 성 마리아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삼촌 밑에서 생활하면서 후일 교황 그레고리오 6세(1045~1046)가 된 지오반니 그라시아노를 스승으로 교육을 받았다.
그는 그레고리오 6세 교황의 비서로 임명됐는데, 1046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3세가 교황청 분규를 해결하기 위해 그레고리오 6세를 폐위했을 때 교황을 수행해 퀼른으로 갔으나 이듬해 그레고리오 6세는 세상을 떠났다.
▲ 하인리히 4세에 의해 추방되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
당시 교회 안에는 크게 세 가지의 악습이 만연해 있었다. 하나는 성직을 사고 파는 성직 매매, 성직자의 불법 결혼, 왕과 귀족들이 교회의 성직자 임명을 좌우하는 평신도 서임권 등이 그것들이었다. 힐데브란트는 이러한 모든 악습들을 개혁하고자 했는데, 처음에는 교황의 고문으로서, 그리고 교황이 되어서는 직접 이러한 악습들을 개혁해나갔다.
1059년 교황 니콜라오 2세(1058~ 1061)에 의해 로마 교회의 대부제로 임명된 그는 1073년 교황 알렉산데르 2세가 서거한 뒤 교황 선출권을 갖고 있던 주교 계층 추기경들이 아니라 시민과 성직자들의 환호 속에 교황으로 옹립됐다.
그해 6월 29일 교황으로 즉위한 그는 이미 자신이 전임 교황들을 도와 추진하고 있었던 교회 개혁 조치들을 자신의 주요한 임무로 여기고 재위 기간 동안 이를 본격 추진했다. 그 첫 조치로서 즉위 이듬해인 1074년, 로마회의에서 성직 매매와 성직자의 결혼에 대한 금령을 다시 공포하고 다음해에 이 교령을 재확인하는 한편 평신도의 성직 서임을 금하는 교령을 반포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만이 정당하고, 교회의 주인이며, 새로운 법령을 제정하고, 주교를 폐하거나 복직시킬 권한을 갖는다는 입장을 명백하게 밝혔다. 또 세속과의 관계에서도 교황은 황제를 폐위할 자격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교회와 세계의 주인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당연히 서임권 문제를 둘러싸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갈등을 빚게 됐다. 성직자 계층이 왕권의 지배 하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은 국가의 권력과 사회 구조를 뒤흔드는 중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평신도 성직 서임에 대한 금령은 주교를 임명하던 황제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그레고리오 7세의 이러한 견해에 저항한 것이 바로 하인리히 4세였다. 그는 교황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주교와 수도원장에 대한 서임권을 계속 행사했다. 결국 1075년 12월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에게 엄중한 경고 편지를 보냈고 황제는 보름스 회의를 개최해 그레고리오 7세에 대한 폐위를 선언했다.
교황은 이에 대응해 황제를 파면, 파문했으며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은 1076년 10월 황제에게 1년 이내에 교황의 파문 취소를 받지 못하면 새 황제를 선출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결국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에서 사흘 동안 교황에게 파문의 해제를 간청했다. 이로써 그레고리오 7세는 성직 서임권 논쟁에서 승리하고 황제권은 치명타를 입었으며 서구 세계의 주도권은 황제에게서 교황에게 넘어가게 됐다.
하지만 하인리히 4세는 또다시 로마를 침공했고 이후 계속된 갈등 끝에 교황은 1085년 남이탈리아의 살레르노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게 됐다. 유배지에서 맞은 죽음은 그를 패배자로 보이게 했지만 뒤를 이은 교황들이 속권에 대한 투쟁을 계속해 그가 추진한 개혁들을 성취함으로써 결국 그는 승리자로 남았다. 11세기 중반에서 12세기로 이어진 「그레고리오 개혁」은, 비록 그레고리오 7세가 그 주창자나 완성자는 아닐지라도 교황권의 확립에 크게 기여한 업적으로 인해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