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째 에이즈 감염인으로 살고 있는 ㄱ씨, 자신이 걸어온 절망의 기억이 떠오르는 지 그의 얼굴에서는 진한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2년 전 45살로 숨진 한 환자는 성폭행을 당해 에이즈에 감염됐어요. 죽음을 앞두고 시신을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혔는데 병원 7곳에서 모두 거절하더군요. 비싼 수술도구를 다 버려야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대니, 이렇게 답답할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의사들조차 이렇게 에이즈에 대해 모르니…』
ㄱ씨가 털어놓는 말에서 드러나는 우리나라 에이즈 감염인의 현실은 들을수록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많다. ㄱ씨와 같은 에이즈 감염인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우리나라 에이즈 정책의 문제점은 관계자들조차 에이즈의 「정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이들이 드물다는 점이다.
- 편견, 잘못된 상식 일반화
한국에서는 의료진조차 에이즈에 대해 편견을 갖는 경우가 많다. 이런 까닭에 일반인 사이에 온갖 풍문과 잘못된 상식이 난무하는 것은 당연하다. 에이즈는 누구나 걸릴 수 있는데도 천형이나 괴질로 보는 시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이런 가운데서 에이즈 감염인은 매년 급증해 2, 3년 내에 국내 연간 감염자가 1000명을 돌파할 것이라는 진단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보건복지부 산하 질병관리본부가 지난 2월 2일 밝힌 바에 따르면 지난해 신규 에이즈 감염인이 535명으로 집계돼 누적 감염인수가 총2540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0년부터 2003년까지 에이즈 감염인의 연평균 증가율은 35.1%로, 이런 추세라면 올해는 723명, 내년에는 976명의 신규 감염인이 나올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따라서 지난 85년 12월 첫 국내 감염인이 발생한 이래 20년 만에 1000명대로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 전 사회 교육 홍보 절실
선진국에서는 일찌감치 에이즈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인 교육 홍보활동을 펼치고 있다.
에이즈에 대한 일반의 인식과는 달리 영국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에이즈 확산 억제에 성공해 적잖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영국은 대처정권 때부터 정부 주도로 「교육만이 에이즈의 유일한 백신」이라는 주제로 언론을 적극 활용한 대대적인 홍보 캠페인을 벌여 효과를 거뒀다. 또 보건부 장관이 「몰라서 죽는 일이 없기를」로 시작되는 편지를 전 국민에게 발송하기도 하는 등 에이즈 문제를 사회문제, 나아가 정치문제로 간주해 적절한 대책을 시행했다. 이런 활동의 결과 1987년 1월 실시된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69%가 에이즈 교육 광고를 보았다고 답했고, 73%가 에이즈를 예방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대답했다.
미국 플로리다주에서는 모든 학생에게 에이즈에 대해 필수교육을 하는 법을 제정해 시행하고 있다.
가까운 일본은 영국을 벤치마킹해 1993년 「에이즈 방지 7개년 작전」을 수립해 예방 홍보 교육에만 전년 대비 30배의 예산을 투입해 대대적인 홍보 활동을 펼쳤다. 나아가 에이즈 감염인을 장애인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사회복지혜택을 받도록 했다.
- 감염인 사목 활성화 필요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예산, 조사, 교육 등 모든 면에서 에이즈에 대한 기본적인 대비책이 부족하다. 이 때문에 아직도 우리 사회에선 에이즈가 「공포의 병」으로 취급받고 있다.
감염인 수가 갈수록 증가 일로를 걷고 있지만 에이즈에 대한 대처는 아직 미온적이다. 지난 85년 6월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가 에이즈 예방대책을 수립한 데 이어 93년 한국에이즈퇴치연맹, 94년 대한에이즈예방협회가 발족돼 에이즈 예방 홍보활동을 펼치며 가톨릭교회 등에서 운영하는 감염인들을 위한 쉼터에 재정적인 지원을 하고 있는 것이 거의 전부일 정도다.
교회에서는 1996년 발족한 한국가톨릭에이즈협의회(회장=노인조 수사)가 중심이 돼 서울에 2곳을 비롯해 인천과 호남지역에 각각 1곳 등 총 4곳의 감염인들을 위한 쉼터를 운영하며 에이즈 감염인들의 인권 보호와 영적 돌봄에 중점을 둔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또 서울 성가복지병원에서 말기의 에이즈 환자들을 위해 호스피스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최근에는 한 여자수도회에서 에이즈 환자들이 인간적인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국내 최초의 호스피스 병원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운영하는 전체 시설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에이즈 감염인의 숫자라고 해야 시설 규모의 한계 등으로 30∼35명에 그쳐 2500여명이 넘는 감염인을 감안하면 역부족인 상황이다. 따라서 에이즈에 대한 체계적이고 폭넓은 예방 홍보 활동과 아울러 감염인들에 대한 관리 및 호스피스 활동 등을 위한 교회의 재정적 사목적 배려가 시급한 실정이다.
※대한에이즈예방협회=24시간 상담전화 1588-5448, ARS (060)700-6191
□ 가톨릭에이즈협의회장 노인조 수사
“잘못된 편견 상식 환자들에게 고통”
▲ 에이즈 환자도 한 형제임을 역설하는 노인조 수사
한국가톨릭에이즈협의회 회장 노인조 수사(예수고난회. 56)는 『아직도 에이즈에 대해 잘못 알려진 것들이 많아 감염인들이 받는 고통과 상처가 크다』며 에이즈 감염인도 우리와 같은 한 형제라는 의식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에이즈협의회 활동을 펼쳐오고 있는 노수사는 에이즈에 대한 것만큼 잘못 알려져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질병도 없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으로 기본적인 믿음만 있으면 되는데…. 우선 마음을 열지 못하는 자세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2, 30년 전 나환자를 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무지로 사랑의 문을 닫고 있는 우리 사회와 신자들의 모습이 노수사로서는 가장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다. 그나마 수도회를 중심으로 교회가 나서 사랑의 지평을 열어가고 있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몰라서 형제를 배척하고 홀로 외로이 죽어가도록 내버려두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노수사는 그래서 무엇보다 에이즈에 대한 교육을 강조한다.
『에이즈 환자도 평생 약을 복용하고 늘 조심해야 하는 당뇨병 환자처럼 하나의 질병을 가진 환자에 불과합니다. 에이즈는 일상생활을 통해서는 결코 전염되지 않습니다』
에이즈라는 병 앞에서 주님을 만나 오히려 누구 못지 않은 큰 마음으로 주위를 배려하다 죽어간 에이즈 환자의 삶을 들려준 노수사는 『에이즈를 통해 성(性)과 가족의 고귀함 등 인류의 소중한 가치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다면 이는 또 다른 은총일 수 있다』면서 에이즈가 새로운 삼천년기의 새로운 도전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하다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고통받는 사람은 원인에 상관없이 도와주셨습니다. 예수가 그랬듯이 교회는 에이즈 감염인들을 위한 사목에 좀더 관심을 기울이고 투신해야 합니다』
■ 에이즈에 대한 몇가지 오해
- 배우자가 에이즈 감염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임신했다면 아기도 에이즈에 감염되나.
『그렇지는 않다. 임신부가 에이즈 치료제를 먹지 않았을 경우 30% 정도가 수직감염되고 약을 먹는다면 8%로 떨어진다. 최근 한 병원에서 부부의 간절한 바람에 따라 아내가 예방 차원에서 약을 먹으며 아기를 가졌는데 아내와 아기 모두 에이즈에 감염되지 않았다』
- 에이즈 환자와 변기를 함께 쓰면 감염 위험이 높지 않은가.
『변기를 함께 쓴다고 감염되지는 않는다. 단 면도기를 함께 쓸 경우 상처가 있다면 감염될 수도 있다』
- 에이즈 감염인과 함께 살면 모기나 벌레를 통해 바이러스가 옮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에이즈 바이러스는 숙주인 사람을 떠나면 곧 죽는다. 감염인의 피를 빤 모기의 몸 속에서 에이즈 바이러스는 소화돼 사라진다』
- 에이즈 감염인과 성관계를 가지면 무조건 감염되나.
『감염인과 한번 성관계를 가져 에이즈에 걸릴 확률은 0.1∼1% 정도다. 이론적으로는 치주염이 있는 감염인과 입안이 헐어있거나 상처가 나 있는 사람이 키스를 했을 때도 바이러스가 옮을 가능성이 있다』
- 내시경 검사나 치과 진료를 하다가 에이즈에 감염될 수도 있나.
『병의원에서 정해진 소독 지침에 따라 해당기구를 소독하면 감염을 100% 막을 수 있다. 그러나 병의원에서 기구를 불충분하게 소독하고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사용하면 전염 가능성은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개연성은 거의 없다』
- 감염된 아이와 사랑 표현을 자제해야 되나.
『아이가 친구, 보모, 학교 선생님과의 일상적인 접촉, 예를 들면 포옹, 키스와 같은 것을 통해서 바이러스를 전파시키지 않는다. 아이와 같이 음식을 먹고, 접시를 쓰고, 욕실이나 침실을 사용하는 것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