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딸 졸업장 대신 받은 이우석-박남희씨 부부
“졸업식 때 예쁜 옷 입고싶어했는데…”
보상금 일부는 성지조성기금으로 봉헌
딸이 못다한 삶 대신 열심히 살려 노력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2월 12일 경북예술고 졸업식장. 학교 밴드부의 음악에 맞춰 졸업을 축하한다며 후배들이 부르는 노랫소리는 여느 졸업식장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이우석(토마스아퀴나스.48.대구대교구 신동본당), 박남희(요셉피나.45)씨 부부에게는 눈물만이 앞을 가린다.
『내 딸이 저 자리에 있었더라면…』
1년 전 대구 지하철 참사로 딸 미영(릿다.19)이를 잃은 이씨 부부는 오늘 딸 대신 명예졸업장을 타기 위해 식장에 나왔다. 미영이가 사고 얼마 전 학교 선배들 졸업식에 갔다와서는 『졸업하는 3학년 언니들이 전부 화장하고 좋은 옷 입고 왔다』며 『나도 졸업식 때 백화점에서 좋은 옷 사입고 가야지 했는데…』 어머니 박씨는 『식구가 많다보니 남들처럼 메이커 옷이나 신발도 넉넉히 사주지 못한게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린다.
『미영이는 제 자식중에 모습도 저를 제일 많이 닮았다』고 말하는 박씨는 『제 자식이지만 늘 웃고 찡그리는 법 없이 살아왔던 심성이 착하고 고왔던 아이』라며 『초등학교 때부터 성당에서 오르간 반주를 맡아서 할 정도로 부지런하고 성실해 주위로부터도 칭찬을 많이 받았었다』고 말한다.
『죽음이라는 것을 까마득하게 멀게만 여기고 있을 아이가 그 뜨거운 불속에서 매캐한 연기를 맡아가며 살려달라 부르짖었을 것만 생각하면 지금도 한 없이 눈물만 흐릅니다』
박씨는 막내 승덕(보니파시오.5)이가 TV에서 지하철 관련 캠페인 장면만 보면 『엄마엄마 지하철 나왔다』하며 『큰 누나 하늘에 그만있게하고 이제 엄마가 데리고 오라』며 보챌때가 가장 마음이 아프다고 말한다.
고등학교 시절 단짝친구였던 김민제(요셉피나.19.대구 성김대건본당)양은 『졸업기념으로 친구 4명이 미영이 것과 함께 우정의 반지를 맞췄다』며 미영이 부모에게 『너무나 천사같고 착한 친구였던 미영이는 하늘나라에서도 잘 지내고 있을거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오히려 미영이 부모를 위로했다. 졸업식을 마치고 학교를 나선 미영이 부모는 곧장 딸의 흔적이 남아있는 대구 시립 납골묘에 딸의 졸업장을 건네주며 다시는 이런 불의의 사고가 생기지 않기를 두 손 모아 기도를 올린다.
『엄마가 꿋꿋하고 씩씩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게 먼저 간 미영이에게 보답하는 길이겠죠』 『미영이한테 못다한 것 동생들에게 더 잘 해주고, 성당에서도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는게 제가 해야할 일인 것 같습니다』
미영이 부모는 최근 지하철 사고 보상금 일부를 본당 근처 신나무골 성지조성을 위한 기금으로 봉헌했으며, 또 어머니 박씨는 교리교사 활동을 하며 딸이 못다한 봉사를 대신하겠다는 마음으로 딸의 1주기를 보내고 있다.
▲ 딸의 명예졸업장을 납골당에 넣어주며 통곡하는 박남희씨.
■ ‘혹시나 살아서 …’ 딸 기다리는 배은호씨
“천국에서 딸을 만나려면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죠”
▲ 「혹시나」하는 생각에 딸이 쓰던 방과 책상을 그대로 남겨두고 있다는 배은호씨가 딸이 생전에 준 생일카드를 보고 있다.
늘 소현이가 준비해온 아빠 생일을 작년에는 막내가 부모 몰래 준비했는데, 생일 케이크를 앞에 두고 소현이 생각에 가족전체가 울음바다가 되기도. 그때부터 소현이 가족은 가족생일을 챙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한다.
『지금도 지하철 역만 보면 딸 생각 때문에 일부러 고개를 돌려버린다』는 배씨는 「소현이가 혹시나 다시 살아돌아오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딸이 쓰던 방과 책상 모두 그대로 남겨두었다.
배씨는 『소현이가 고등학교 졸업 후 아빠일을 돕겠다고 약국에서 아르바이트 하며 모은 돈을 고스란히 제 생일선물로 건네주었던 착한 딸이었다』며 회고한다.
『아빠! 소현이예요. 말썽많은 철없는 딸이예요 … 새로운 약사 선생님 오실때까지 소현이가 도와드릴께요. 참 아빠! 건강이 최고예요』
딸이 쓴 생일카드를 바라보는 배씨의 두 눈에 이슬이 맺힌다.
『소현이는 죄 짓지도 않고 죽었으니 분명 하늘나라에 갔을겁니다. 저 또한 하늘나라에서 소현이를 만날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야 겠다는 마음뿐입니다』
■ 죽을 고비 넘긴 이규창씨
"이제 한 살, 감사하며 살죠”
대구지하철 참사 때, 생사의 갈림길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이들도 있다.
이규창(안토니오.27.반야월본당)씨. 기도를 심하게 다쳤다. 의사들도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포기했던 청년은 1년이 흐른 지금, 당시의 아픔을 조금은 극복한듯 건강하고 밝아보였다.
『벌써 1년이 흘렀군요. 지금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는 이씨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얼굴에는 살아남았다는 기쁨, 희생자들에 대한 안타까움 등 여러 표정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사고 당시 병원으로 실려온 이씨는 38세 신원미상자로 신분이 잘못 기록됐고, 살아날 가망성이 없어 흰색천으로 덮어놓은 상태였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버지 이기호(스테파노)씨와 어머니 김옥희(스테파니아)씨는 병원 곳곳을 뒤지면서 아들을 찾았다.
기적적으로 생명은 얻었지만, 사고 휴유증으로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뜨거운 열기로 기도가 타들어가 숨쉬는 것도 힘들었고, 몇달동안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영영 말을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도 했지만, 이렇게 숨을 쉬고,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합니다』
아직도 간간이 기침을 하면 가래속에 검은 가루가 섞여나오기도 하고, 목소리도 쇳소리를 내며 갈라져나온다.
육체적 고통 못지 않게 정신적 충격도 컸지만, 기도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사고 후, 새생명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매주 성당을 찾고, 하루하루 감사의 묵주기도를 봉헌한다. 그래서일까? 묵주반지가 유난히 반짝였다. 지난해 11월 견진성사때 선물받은 것으로 하루도 손에서 빼놓지 않는다.
『사고 이후, 지하에는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중앙로역 개통전 굳게 마음 먹고 찾아가 계단을 몇걸음 내려가다 다시 되돌아왔습니다. 그러다 몇주전 폭설로 지하철을 타게 됐는데, 심장이 뛰고 숨이 멎는 듯 해서 100미터 남짓의 계단을 내려가는 데 마치 몇시간이 흐르듯 했습니다. 그리고 중앙로역에 찾아가 희생자들의 영혼을 기억했습니다』
영남대 경영학과에 재학중인 이씨는 지금 휴학중이다. 내년 2월 졸업을 앞두고, 여느 대학생처럼 도서관에서 전공, 영어관련 공부도 하고, 자격증 관련 시험준비도 하면서 분주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현재에 충실하고 싶다는 이규창씨는 『삶의 어려움을 딛고,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며 희망 가득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사고나기 전 저는 죽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새생명을 주셨고, 이제 한살인 셈이죠. 그동안 많은 이들의 도움과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제 제가 갚아드려야할 때인 것 같습니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이웃들에게 작은 도움을 주면서 열심히 남은 생을 살고 싶습니다』
▲ 학교 도서관에서 신문을 열람하고 있는 이규창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