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물음의 명료한 답을 얻기 위하여 필자는 잠깐의 집중과 인내를 요하는 사유과정에 독자를 초대한다.
확실한 것은 그 요건이 정태적(情態的)이지 않고 동태적(動態的)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교회 자체가 동태적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움직인다. 마치 사랑이 움직이는 것처럼. 궁극적인 「하나」를 향하여 사랑이 끊임없이 궤적을 그려나가는 것처럼 교회는 움직인다. 교회는 최대치(또는 점근선)를 향해서 접근해 가는 다양한 움직임이다. 그 최대치(또는 점근선)를 우리는 「하느님 나라」(Kingdom of God)라 부른다. 교회는 지상에서 구현되는 하느님 나라이다. 지상에서 구현되는 하느님 나라는 전체 하느님 나라의 일부일 뿐이다. 그런데 지상에서 구현되는 하느님 나라는 계속 성장한다. 이를 예수님은 비유로 설명하셨다.
『어떤 여자가 누룩을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온통 부풀어 올랐다. 하늘 나라는 누룩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 33).
『하늘 나라는 겨자 씨에 비길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밭에 겨자씨를 뿌렸다. 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지만 싹이 트고 자라나면 어느 푸성귀보다도 커져서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마태 13, 31~32).
지상의 하느님 나라인 교회는 미량의 「누룩」이 빵을 크게 부풀리듯이 혹은 작은 「겨자씨」가 크게 자라나듯이 성장한다. 이를 우리는 가톨릭적 「다이내믹」이라 부르기로 하자. 이 말마디에 완전(完全)과 전체(全體)를 향한 역동성이 담겨있으니 말이다. 그렇다. 「가톨릭」에는 완전을 향한 다이내믹과 전체를 향한 다이내믹이 있다. 바꿔 말하면 질적 다이내믹과 양적 다이내믹이 있다.
▲ 「가톨릭」에는 완전(完全)과 전체(全體)를 향한 역동성이 담겨있다.
질적 다이내믹
「가톨릭」(보편적)은 말뜻 자체가 완전을 향한 다이내믹을 함의한다. 「완전」이 무엇인가? 아니 역으로 「무엇」이 완전한가? 이에 대해 답을 하려면 절대, 영원, 불변, 진리, 신 등의 단어를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톨릭」이 완전을 추구한다는 말은 「종교」라는 단어가 종(宗) 곧 「마루」 또는 「근원」을 추구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과 통한다. 반나치 운동을 벌이다 순교한 독일의 개신교 목사 본회퍼(1945년 순교)는 「가톨릭」이라는 용어에서 바로 이런 깊은 의미를 뚫어보았다. 그는 우리의 신앙이 「가톨릭」적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에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이상의 것」, 곧 『우리의 내부에 「저 너머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에게 「그 이상의 것」, 「저 너머의 세계」는 「가톨릭」이라는 단어에 함축되어 있는 보편적인 것, 곧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 유효한 것,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이다. 결국 본회퍼가 「가톨릭」이란 단어에서 발견한 것은 「하느님」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향한 추구였다고 줄여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사유를 했던 원조격의 인물은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그는 「가톨릭」 신앙은 모든 존재의 근거인 「존재 자체」(ens ipsum) 또는 「가장 실재적 존재」(ens realissimum)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가톨릭」은 그 근원을 향한 회귀운동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가톨릭」은 삼라만상의 근거요 근원인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질적 다이나믹을 내포한다. 곧 그 경지, 그 이상을 끊임없이 찾아 나아가는 운동을 내포한다. 이 명제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
이 명령이 「가톨릭」이란 말뜻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완전」의 실제적 내용을 성서는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가 6, 36).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 2).
양적 다이내믹
「가톨릭」(보편적)은 또한 전체를 향한 다이내믹을 내포한다. 전체를 아우를 수 있어야 「가톨릭」이 되기 때문이다. 이 다이내믹은 예수님의 지상명령(至上命令)에서 나온다.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
이렇듯이 가톨릭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을 향하여 움직인다. 이런 의미에서 로마노 과르디니는 「가톨릭」은 본래의 본질적 전체성에 의거해서 다양한 유형의 세계관을 포용-포섭하는 포괄적인 지평과 효용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는 모든 분화, 차별화, 특수화에 대해서 통합적이고 우주적인 관점을 지향한다. 이는 무신론자, 타종교인, 타교파인 모두를, 곧 온 인류, 아니 우주만물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섭리를 전제로 하는 다이내믹이다.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 우주만물을 위한 가톨릭(보편)적 구원역사를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해 놓으셨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이렇게 말한다.
『그 분은 모든 것의 시작이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최초의 분이시며 만물의 으뜸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본질을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 시켜 주셨습니다』(골로 1, 14이하).
그러므로 「가톨릭」은 당연히 「하늘과 땅의 만물」, 온 인류를 향해 열린 자세를 취한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들 두 가지 다이내믹이 서로 줄다리기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다. 질적으로 완전(完全)을 지향하다 보면 아무래도 「독선」이나 「폐쇄」로 기울 여지가 많다. 양적으로 전체(全體)를 겨냥하다 보면 아무래도 「변질」이나 「이완」에 빠질 소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