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살아온 길을 되돌아볼 때면 내 계획이나 생각에 따라 이뤄진 일보다 엉겁결에 이뤄진 일이 더 많은 것 같기만 하다. 물론 이 모든 일 가운데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숨결이 배지 않은 일은 하나도 없었던 것 같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기도 하다.
가톨릭실업인회 회장이 한국평신도사도직협의회의 당연직 부회장이어서 실업인회 활동과 동시에 평협 일에도 관심을 둬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평신도들의 대표라 할 평협은 모름지기 신심이 두터운 이들이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에 부회장시절 동안 회의에 한번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힘이 되고자 했다.
그러던 중 평협 회장을 맡아달라는 제의가 왔다. 당시 나는 주위에 신심이 두터운 이들이 교회나 평협을 이끌어야한다고 숱하게 말해오던 터라 그런 제의가 어이없게 들리기까지 했다. 몇 년에 걸친 출마 제의를 고사해오던 중 한번은 회원들끼리 마음을 모아 총회 때 회장 후보로 올리겠다는 말을 듣고 갑작스런 일이 생겼다는 핑계로 도망치다시피 일본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그러나 급기야 92년 제9대 평협 회장 선거 때는 무투표 만장일치로 회장에 추대하는 데다 신부님과 주교님까지 나서셔서 일을 맡기는 바람에 교회에 대한 마지막 봉사라는 마음으로 회장직을 수락하고 말았다.
평협 회장으로 뽑히자마자 당장 이튿날부터 시작한 일이, 도움을 청하기 위해 전국 각 교구를 방문하는 일이었다. 전주와 광주대교구를 필두로 14개 교구를 돌던 내 뇌리에는 「일치를 이루는 자가 되라」는 주님의 말씀이 그 어떤 소리보다 큰 울림으로 전해져왔던 것 같다.
94년부터는 교회 차원의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이 새롭게 불붙기 시작했는데 이 때 평협 내에 처음으로 도농협력분과위원회를 만들어 농촌을 살리는 일에 힘을 보탰다. 무너져 가는 농촌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자 했던 그 때의 노력이 지금까지 이어져오며 농민들에게 희망이 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하느님의 계획에 찬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회장 임기 내내 도덕성을 회복하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내탓이오」 운동을 비롯해 우리농산물먹기운동, 우리상품쓰기운동 등을 뿌리내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기도 했던 기억은 지금도 새로운 의지로 평신도들이 일어서 사회를 이끌어 나가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평협 회장으로 활동하던 기간 중 아시아 각국의 평신도 대표들이 함께 한 가운데 「동아시아 평신도대회」(1992)와 「제1회 아시아 평신도회의」(1994)를 성공적으로 치르며 눈부신 성장을 하고 있는 한국교회와 아시아교회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도 나름대로 큰 성과였다.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나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는 이 시기의 깨달음이 한국교회의 본격적인 해외 원조와 선교사 파견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순간을 지켜보며 느꼈던 감동들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지금껏 치른 수많은 행사와 순간들을 되돌아볼 적마다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벅찬 마음을 누르기 힘들었던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이 모든 게 하느님의 지혜에 따라 이뤄질 수 있었음을 깨달은 것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쩌면 교회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한 내 행동이나 말이 진정 도움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은 고사하고 오히려 짐이 되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적지 않다. 누군가 「하느님을 향한 열정이 고갈되면 자신 안의 사랑도 메마를 수밖에 없다」고 했던가. 다만 내 마음 속에 주님을 향한 열정이 살아 숨쉬고 있음에 스스로를 위로하며,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날 남은 열정 한오라기까지 남김 없이 태운 채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서고 싶은 마음뿐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