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의 유혹 장면을 보면서 예수님은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느낌을 가져 봅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이란 진정한 의미의 행복이기 보다는 약간은 장난기가 섞이고 또 부러워하는 듯한 의미가 포함된 말이긴 합니다만 어떻든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40일 동안 유혹을 받으셨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왜 이 사실에 부러움을 느끼는가 하면 저의 경우 때문입니다. 저는 올해 40을 넘기고 있습니다만 너무나 자주 예수님이 겪으셨던 유혹을 겪고 있고 그 유혹 앞에 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오늘 복음을 보면서 합리화해 봅니다. 나도 40일 동안만 유혹을 받았다면 그래도 극복해 볼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예수님을 행복하다고 부러워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물론 문학적인 표현이겠습니다만 예수님은 사탄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외적인 존재로부터 유혹을 받고 있는 사실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를 보면 「의식할 수 없는 내안의 무엇」, 그리고 「선을 가장한 아름다운 속삭임」의 형태로 유혹은 다가옵니다. 그러기에 때로는 이것이 유혹인지 조차 구별하지 못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고, 더욱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의 본능과 유혹이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기에 자연 상태에서는 너무나 쉽게 유혹에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물론 성서적 상징이겠습니다만 오늘 복음에 나오듯 예수님처럼 외적인 존재인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는다면 의지적으로나마 유혹 앞에서 한번더 저항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너무나 어린애 같은 욕심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든 오늘 복음과 연결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수고 없는 결과, 자연의 질서를 넘어서는 결과는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만족」이란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이 말은 비용보다 보상이나 결과가 클 때 쓰는 말입니다. 여기서 비용과 보상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관계나 정신적인 작용까지도 포함한 말입니다만 어떻든 인간은 「보상의 극대화」와 「비용의 최소화」를 통해 만족한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노력은 반대편에 서있는 대상에게는 정 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상호작용 안에 있는 인간이 함께 만족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선에서의 비용의 최소화가 이루어져야 된다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과정 없는 결과나 수고 없는 결실을 바라는 우리의 욕심을 자제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순 첫 주일을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내용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전제 조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성서 곳곳에서 빵의 중요성을 의식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이 왕이심을 부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보면 빵과 권력 그 자체의 중요성은 그대로 간직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첫 번째 유혹을 보면 우리가 극복해야할 부분이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것은 빵 자체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돌더러 빵이 되라는 요구」, 즉, 수고하지 않는 빵, 즉 비용의 지출 없이 빵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가 바로 극복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유혹도 마찬가지입니다. 「악마에게 절을 하면 세상의 권력과 영광을 주겠다」. 부정한 수단이나 죄스런 방법을 통한 권력추구가 문제가 되는 것이지, 권력자체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그리고 참 매력적인 요구인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보라는 요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개인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아마 예수님이 이러한 유의 마술적인 기적을 행했다면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성전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간단한 방법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음미해야할 사실은 기적은 거부했지만 자연적 질서와 인간의 수고에 의한 낙화산이나 비행기 등 과학적 발명은 우리에게 허락하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이 구절에서 의미하는 바는 터무니없는 초능력을 갖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에 대한 경고인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이 경험했던 사탄은 결국 외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게 됩니다. 수고 없는 빵을 바라는 마음, 맹목적인 권력 추구, 그리고 초능력을 갖고자 하는 욕심 등, 내 안에 자리한 욕구 아니 모든 인간 안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욕구가 바로 사탄의 진정한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이러한 유혹을 물리치셨다함은 자신을 이겼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요, 내안의 탐욕의 경계와 비용과 보상에 대한 올바른 마음가짐만이 자신을 이기는 길이란 사실을 우리에게 교훈으로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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