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건너 불?
요즈음에 들어서 남미의 가톨릭 신자들이 대거 개신교로 넘어간다고 한다. 특히 성령의 은혜와 축복을 강조하는 오순절 교단 계통의 교회들이 가톨릭 신자를 겨냥한 선교활동을 공세적으로 펼치면서 톡톡한 재미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가슴이 아리다. 강 건너 불이 아니라 집안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다. 노리는 그들도 문제요 넘어가는 사람들도 문제이며 빼앗기는 가톨릭교회도 문제다. 이 무슨 꼴인가? 셋 다 반성을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겨진다. 집안싸움에서 빼앗은 자의 기쁨이 과연 진정한 기쁨일 수 있을까. 실리(實利)와 감각적 행복(wellbeing)을 위해서라면 절개와 충절을 쉽게 내팽개치는 것이 아무리 요즘 세태라고 해도 신앙에서조차 그래서야 되겠는가. 그곳의 가톨릭교회가 오죽 게으르고 무기력하고 실망스러웠으면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겠는가.
차제에 가톨릭교회는 뼈를 깎는 아픔으로 회개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이는 가톨릭교회가 가톨릭교회(ecclesia catholica) 본연의 색깔과 향기를 잃었기 때문에 초래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지난 호에서 언급하였던 완전(完全)을 향한 질적 다이내믹이 부족할 때에는 이런 현상을 인력으로 막을 수 없게 마련인 것이다. 중세교회 방식으로 울타리를 높이 쳐놓고 『가톨릭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으름장을 놓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남미 가톨릭교회는 신자들이 그토록 목말라하는 은총, 축복, 구원이 자신 안에 차고 넘치는 교회가 되도록 「질적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결코 이 사태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혹시
남의 일이 아니다. 한국 가톨릭교회라고 결코 사정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 통계상으로 드러나 있다. 몇 가지만 예로 들어보자.
- 개신교에 비할 때 가톨릭신자는 서비스만족도에서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턱없이 낮은 점수를 주고 있다. 「힘들 때 도움을 요청하고 싶은 곳」으로 자신의 교파 교회를 지목한 경우가 개신교신자에게서는 72.8%에 달했으나 가톨릭 신자는 27.0%에 불과했다(한울아카데미, 「한국 개신교와 한국근현대의 사회문화적 변동」, 2003). 참고로 불교신자의 경우는 51.2%로 나타났다. 가톨릭신자 대부분이 교회에 대해서 별스런 기대를 걸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누가 처음부터 기대를 접겠는가! 하도 실망스러우니까 살면서 점점 그렇게 길들여지게 된 것이 아니라면 이를 어떻게 달리 설명할 수 있을까.
- 가톨릭신자의 신앙의식이 개신교신자에 비할 때 훨씬 비복음적이며 현세 지향적이다. 종교생활의 동기가 개신교신자에게서는 구원(영생) 54%, 마음의 평화 25.7%, 진실된 삶 11.9% 순으로 나타난 반면 천주교 신자에게서는 마음의 평화 53.9%, 진실된 삶 20.2%, 구원(영생) 11.2% 순으로 나타났다(「한국 개신교와 한국근현대의 사회문화적 변동」, 2003). 이만큼 가톨릭신자는 종교의 본질적인 지향인 「구원」(영생)보다는 그 종속적인 지향인 「평화」와 「진실된 삶」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는 얘기다.
-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가톨릭신자는 개신교신자보다 상당히 떨어지는 종교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종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도 3.6% 대 11.3%, 연1회 이하의 종교행사 참석 신자율 10.5% 대 14.4%, 기도를 안 하는 신자율 5.3% 대 12.7%, 경전을 안 읽는 신자율 9.8% 대 18.6% 등으로 차이를 드러냈다(한국갤럽,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1998). 이로써 천주교신자는 전반적으로 개신교신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이완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 끝으로 신자 고령화 현상이 개신교보다 심각할 만큼 뚜렷하게 진행되고 있다. 종교 내 청년인구(18~30세) 비율에서 개신교는 46%대에 육박하고 있으나 천주교는 19%대에 그치고 있다(한국갤럽,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1998). 참고로 불교는 33%대로 나타났다. 이는 그대로 향후 몇 십 년 후의 종교인 분포를 예시(豫示)해 주는 불길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수치들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 혹시 이는 가톨릭교회가 개신교보다 완전을 향한 질적 다이내믹의 면에서 뒤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통계가 아닐까? 가톨릭교회는 무늬만 가톨릭이요 이름만 가톨릭이라는 사실을 통렬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아니고 무엇일까?
길은?
하나다. 길은 하나다. 지금부터라도 뭔가를 시작하는 것이다. 맥없이 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먼저 깨달은 사람이 먼저 행하는 것이다. 먼저 본 사람이 먼저 길을 떠나는 것이다. 성직자이든, 수도자이든, 신자이든 선각(先覺)한 사람이 먼저 불모의 광야에서 길을 예비하는 것이다.
성서는 준엄하게 명령한다.
-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던 「그분」(요한 1, 14)처럼 너희의 교회에 은총과 진리가 넘치게 하여라. 「당신(하느님)의 은총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앞으로 올 모든 세대에 보여」(에페 2, 7) 주거라.
-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너희 교회도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요한 10, 10) 하여라.
-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너희 교회도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요한 15,11) 하여라. 그리하여 너희 교회에 깃들 곳을 찾아 모여드는 내 모든 자녀들이 『우리는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큰 위안을 받고 기쁨에 넘쳐 있습니다』(2고린 7, 4)라고 환호하게 하여라.
- 지금 불안과 염려에 시달리는 나의 자녀들에게 「내 평화」를 전하여라.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요한 14,27) 너희 교회가 내 평화를 그들의 가슴에 심어주어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게 하여라(같은 곳).
말씀인즉슨, 은총과 진리, 생명, 기쁨, 평화가 넘치는 교회라야 「질적으로」 가톨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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