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들어 성서 읽는 재미에 새롭게 빠져들고 있다. 읽을수록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성서의 묘미는 뭐라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동과 설렘을 전해준다. 특별히 오랫동안 마음이 머무는 성서가 지혜에 관한 많은 깨달음을 담고 있는 집회서다.
「지혜의 시작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집회서뿐만 아니라 모든 성서에서 공히 얻을 수 있는 이 가르침은 세월이 두께를 더할수록 참으로 공감의 깊이 또한 더하는 말이다. 지난 세월은 마음에 품은 주님께 대한 두려움만큼 지혜의 불길도 일어났다 사그라짐을 깨달아온 시간이었다.
회사를 운영해오던 중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위기의 순간을 떠올릴 때면 하느님이 주시는 지혜의 힘을 다시 한번 실감케 된다. 70년대만 하더라도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본 샤프본사로부터 금형을 빌려다 제품을 만들고 되돌려주곤 했다. 당시 무역을 담당하고 있던 간부가 회사를 위하는 마음에 윗사람에게 제대로 의논도 않고 금형 대여료를 싸게 해달라고 일본측에 부탁해 성사단계에 이르게 됐다. 그런데 세관 감시과장이 우연히 그 간부의 방에 들렀다가 이 거래로 인한 플러스 요인을 계산해둔 메모를 보고 만 것이다. 그 간부가 일의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지혜롭게 처신했더라면 순리대로 풀렸을 텐데 당황해서인지 얼버무리려다 오히려 자신과 담당 일본인 부사장마저 관세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사태로까지 번지고 말았다.
나도 모르는 가운데 벌어진 황당한 사태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일본 샤프에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해 사태를 파악하느라 난리가 났다. 우리에게 도움을 주려 한 일인데 결과적으로 피해를 준 모양이 돼 내 입장이 난처해진 것은 둘째치고 자칫하면 신의를 바탕으로 일궈온 회사가 하루아침에 문을 닫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하게 된 셈이다.
회사를 위해 일한 사람들이 그렇게 됐으니, 그 때의 심정은 죽고 싶은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주님, 제 지혜로는 도저히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을 당신께 맡기니 당신 뜻대로 하소서」.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마음에 사흘째 되는 날부터 9일기도를 바치며 난국을 헤쳐나갈 지혜를 청했다.
잠시 피해있으라는 주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아랫사람의 잘못이 곧 내 잘못이라는 생각에 도의적인 책임을 다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구속을 각오하고 내 발로 걸어 담당검사를 찾아갔다.
『모든 책임은 제게 있으니 저들은 풀어주시고 대신 저를 잡으시지요』
주님의 안배이셨을까. 나중에 국무총리까지 지낸 이 부장검사는 우리 회사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며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면서 오히려 위로까지 해주며 돌려보내는 게 아닌가. 이 일이 있은 후에도 나는 기도 속에 주님께 매달렸다. 지혜를 청하며 간구한 결과였을까, 두 번째 9일기도를 바치던 마지막 날 묵주기도를 마침과 동시에 부사장 일행의 석방소식이 전해져왔다. 순간 내 가슴속으로는 뜨거운 무엇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다 살아 나온 기분이었다. 나는 이 일로 세상을 안배하고 이끄시는 주님의 지혜를 새삼 실감하게 됐다.
지금껏 살아오며 제 꾀에 자신이 넘어가는 경우도 수없이 보아왔고 하찮은 인간의 지혜에만 의지해 하느님의 영역까지 넘보는 모양도 적잖이 대해왔다. 이 모든 게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범하게 되는 우가 아닌가 싶다. 누구든 가슴에 하느님을 품으면 겸손함이 생기고 겸양이 있으면 주님의 지혜가 따르는 법인데 그런 지혜를 갖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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