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쌀쌀한 날, 얇은 셔츠 하나만 걸친 초췌한 모습으로 70대 후반의 어르신이 찾아오셔서 『자식을 구속시켜야겠으니 도와주시오』하며 고소장과 진단서를 꺼내셨다. 몇 날 동안 여관에서 지냈다며 시퍼렇게 멍이 들고 부어오른 상처들을 보여주셨다.
사연은 평소 며느리가 할아버지 방에서 어린 손녀가 노는 것을 못마땅해 했는데 하루는 퇴근한 아들이 손녀를 불러내 자지러지게 울도록 혼을 내더라는 것이다. 손녀가 할아버지 방에서 함께 논 것이 무슨 큰 잘못이기에 그 어린것을 혼내는지 아들에게 따지려다 싸움이 된 것이다. 아들의 힘에 밀려 거실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고 하시며, 『젊은것의 힘을 당할 수가 있어야지…』하고 말끝을 흐리셨다. 『옷 한벌 제대로 사 입지 못하고 고생해서 작은 아파트 하나 장만해 아들에게 주고 이제 부모 노릇 했구나 하고 마음 편히 살려고 했더니 이게 무슨 일이냐, 하루종일 말 한마디 붙이지 않는 며느리와 지내다가 할아버지와 놀아주는 손녀가 무척 고맙고 대견한데 그것이 무슨 큰 잘못한 일이냐, 이래서 어떻게 살겠냐』고 하시면서 가슴을 치셨다.
이유야 어떻든 아들이 큰 잘못을 했지만, 처벌을 받게 되면 마음이 편치 않으시니까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설득을 하니 조금 누그러지셨는지 아들에게 뜻밖의 제안을 하셨다. 복음서 한권을 적어오면 용서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들의 반응은 『맞는 것도 어릴 때 일이지, 무작정 때리려고 덤비는 아버지에게 가만히 있을 자식이 어디 있느냐. 이젠 그런 아버지 필요없다』는 것이다. 그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대화를 하면서도 진한 아픔이 느껴졌다. 아버지는 자식의 행동이 너무나 괘씸했지만 용서하려는데, 아들은 그런 아버지가 필요없다고 하니.
시대가 변해도 변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 아무리 세상이 어려워도 달라지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런 중요한 가치들이 흔들리고 있다고 느껴지니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노인은 하나의 거목과 같다. 아이들이 그 그늘에서 쉬고 뛰어 놀 수 있는 울창한 나무이다. 이 고목은 인생의 여러 시기가 연륜을 그리며 자라온 것이다」(사목 51호). 우리들을 지켜오던 그 거목들이 흔들리고 있다. 수 세대 혼란기를 거듭하고 전쟁과 온갖 소용돌이 속에서 가족들을 위해 자리를 지키던 그 거목들이 흔들리고 있다. 아직도 그 그늘에서 쉬고 뛰어 놀아야 할 우리의 어린 자손들이 자라고 있는데도 말이다. 우리를 지탱하던 그 거목들이 흔들리면 우리의 유년기, 우리의 청년기, 우리의 노년기는 어디에 어떻게 자리를 잡아야 하는가? 아버지께 대한 사랑의 모범을 따르는 우리들이 먼저 세상에 손을 내밀어 변화의 힘이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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