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를 관통하는 구원의 법칙이 있다. 그것은 끊임없는 「회개」의 법칙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살려거든 회개해야 한다고 했다. 『살고 싶으냐? 나를 찾아오너라』(아모스 5, 4).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나라에 동참할 조건으로서 「회개」를 선포하였다. 예수님도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똑같이 먼저 회개할 것을 촉구하셨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
회개는 개인에게 뿐 아니라 교회에 대해서도 유효한 법칙이다. 교회의 회개를 우리는 쇄신(刷新)이라 부른다. 그래서 『교회는 부단히 쇄신해야 한다』는 명제가 만고의 진리로 통하고 있다.
자만은 금물이다. 주저앉음도 게으름도 금물이다. 답습도 타성도 관행도 금물이다. 자칫하면 저 옛날 소아시아의 라오디게이아 교회에 떨어졌던 불호령이 「가톨릭」을 자부하는 우리에게 떨어질 수도 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잘 알고 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차라리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러나 너는 이렇게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기만 하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너는 스스로 부자라고 하며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네 자신이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묵시 3, 15~17).
늘상 자신이 「가톨릭」임에 자긍심을 갖고 스스로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듯」이 살아가지만 혹시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이 우리의 실제 모습은 아닌지 냉철하게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 가톨릭과 개신교의 선교노력의 차이는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가톨릭」이라는 이름을 달고 다니는 우리는 「아마추어」 수준 곧 「비가톨릭」적이며 「가톨릭」이라는 명찰이 없는 개신교는 「프로」 수준 곧 「가톨릭」적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또 하나의 성찰
지난 호에서 우리는 가톨릭교회가 가야할 길에 대해서 성찰하였다. 그것은 완전(完全)을 지향하는 질적 다이내믹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제 그 초점을 전체(全體)를 향한 양적 다이내믹에로 옮겨 보자. 이를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바꾸어 성찰할 수 있다. 『우리의 선교(복음화) 노력은 얼마나 「가톨릭」적인가?』
「가톨릭」이 지니는 전체를 향한 양적 다이내믹은 뭐니 뭐니 해도 온 인류를 향한 선교열정으로 나타나게 되어있다. 선교의 목표는 분명히 「땅 끝」 모든 민족이다(사도 1, 8). 이 대목에서 우리는 정직해야 한다. 가슴 아프지만 우리의 치부를 드러내 보일 줄 알아야 한다. 한국 천주교회의 복음화 노력은 과연 「땅 끝」, 「온 인류」를 겨냥하고 있는가? 인류까지는 아니라도, 이웃나라(중국, 일본), 동족(북한)을 향한 실제적인 비전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과연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의욕은 있는가?
이미 한국 개신교는 「세계선교」 슬로건을 곳곳에 걸고 세계 오지로 수 천의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중국, 북한 등 지역별로 특화된 다양한 선교전략을 세워 그에 합당한 선교사 양성과정을 개설하여 왕성하게 움직이고 있다. 양적으로, 질적으로,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가히 한국 가톨릭교회를 압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에서도 가톨릭교회가 미처 손을 내밀지 못하는 후미진 곳들의 소외된 이들, 예컨대 외국인노동자, 탈북주민, 노숙자들, 장애인들에게 복음의 손길(말씀의 위로와 자선)을 펼치고 있다.
과장 없이 고백하건대 이 선교노력의 차이는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가톨릭」이라는 이름을 달고 다니는 우리는 「아마추어」 수준 곧 「비가톨릭」적이며 「가톨릭」이라는 명찰이 없는 개신교는 「프로」 수준 곧 「가톨릭」적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창피하지만 감출 수 없는 현실이다. 얘기가 여기에 이르면 예수님의 호된 경고말씀이 들려오는 듯 하다.
『또 이런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먼저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여라」하고 일렀다.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가서도 같은 말을 하였다. 둘째 아들은 가겠다는 대답만 하고 가지는 않았다. 이 둘 중에 아버지의 뜻을 받든 아들은 누구이겠느냐?』하고 예수께서 물으셨다. 그들이 『맏아들입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마태 21, 28~31).
혹시 우리가 바로 말만 하고 실행치 않은 둘째 아들의 꼴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자랑거리로 삼던 「하느님 백성」의 기득권도 그 정신과 내용을 상실하면 결국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고 선언했던 사도 바울로의 말씀도 결코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이스라엘 사람이라 해서 다 이스라엘 사람은 아니며 아브라함의 후예라 하여 모두 아브라함의 자녀는 아닌 것입니다』(로마 9, 6).
무서운 말씀이다. 「가톨릭」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고 해서 다 「가톨릭」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름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알맹이가 없으면 이름은 소용이 없다.
라오디게이아 교회에 내려졌던 불호령이 오늘날 정체(停滯)에 빠진 가톨릭교회를 위한 말씀이라 할 수 있다면 그 다음에 이어지는 권면도 똑같이 명처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에게 권고한다. 너는 나에게서 불로 단련된 금을 사서 부자가 되고 나에게서 흰 옷을 사서 입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고 또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눈을 떠라』(묵시 3, 18).
「불로 단련된 금」은 무엇이며, 「흰 옷」은 무엇이며 「안약」은 무엇일까? 악조건을 무릅쓰고 복음을 증거하면서 온갖 궂은 일(고통, 짐, 번민)을 감내하여 얻는 은총이, 십자가가 기약하는 부활이 바로 그 「금」이 아니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께 죽기까지 충실하여(곧 믿어서) 얻는 구원의 두루마리가 바로 그 「흰 옷」이 아니겠는가. 성령의 비추임 곧 지혜, 지식, 식별의 은사가 바로 그 「안약」이 아니겠는가. 요컨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의 세 가지, 곧 중단 없는 달음질, 죽음을 불사하는 충성, 영의 식별, 이들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방문(藥房文)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