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라는 말을 소극적 의미의 자유와 적극적 의미의 자유로 구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소극적 의미의 자유란 「- -으로부터의 자유」를 뜻 합니다. 압제로부터의 자유 등 해방과 벗어남의 의미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자유란 또 다른 측면을 가집니다. 적극적 의미의 자유인 「- -을 위한 자유」가 그것입니다. 어떤 목적을 위해 자신을 다스리는 의지와 책임의 행동을 뜻하는 개념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자유란 개념을 소극적인 의미로만 자주 사용한 까닭에 이런 정의가 새삼스럽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만 자유를 뜻하는 한자를 보면 자유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自由」를 뜻하는 한자는 「스스로」를 의미하는 말과 「머무르다」란 말의 합성어입니다. 스스로 머무른다. 강요나 지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다스리는 행위입니다. 그러기에 자유란 말은 「벗어남과 해방」이라는 면과 「목적을 위해 자신을 다스리는」 의지적인 면이 만날 때 의미를 가지는 말입니다. 적절한 예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느님에게 머무르기 위해 인간을 유혹하는 세상의 좋은 것에서 해방되는 것, 아내를 사랑하기 위해 아름답고 상큼한 모든 여인에게서 의지적으로 벗어남 등이 자유가 가지는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회개하면 흔히 죄를 전제로 죄에서 돌아섬이 마치 회개의 전부인양 이야기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기에 회개란 분명 기쁜 소식임에도 불구하고(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첫 복음이 바로 회개임) 왠지 모르게 음울함과 움츠려듦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유는 회개가 가지는 또 다른 면을 우리가 간과하기 때문입니다.
회개란 죄의 유무와 상관없이 삶의 변화라는 또 다른 면이 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바오로 사도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에 주님을 뵙고 회개하는데, 이 회개의 과정은 죄에서 돌아선다는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사실 바오로의 삶은 죄와는 거리가 먼 삶이었습니다. 율법에 대한 열성과 흠 없음을 간직하던 사람이 바오로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유익한 것이었고, 자랑할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소중한 것들을 주님과의 특별한 만남 후 포기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가꾸어 왔던 일상의 삶이 죄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깨닫게 된 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장해물이었기에 포기하는 것입니다. 「더 가치로운 삶」을 위해 지금까지의 삶을 포기함이 바오로의 회개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바오로 사도의 회개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참회나 십자가 오른편에 달린 강도의 후회와도 다른 것이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베드로의 눈물과도 분명 차이가 납니다. 예에서 보지만 이들의 회개는 「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에 눈물과 움추림입니다만 바오로 사도의 회개는 「지금까지의 일상의 삶」과 「가치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에 그 결과는 「깨달음과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러한 바오로 사도의 회개가 바로 우리 신앙인들이 사순절을 지내면서 가슴 깊이 간직해야할 회개의 또 다른 면인 것입니다.
사순 3주일인 오늘 복음은 먼저 빌라도가 갈릴레아인들을 학살한 사건과 실로암탑 사건을 전하면서 회개의 또 다른 면을 묵상케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사건을 보면서 죽은 사람들은 죄 때문에 천벌을 받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이스라엘만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은연중에 가지고 있는 생각인데, 예수님은 이 사건을 예로 들면서 현재의 불행과 죄는 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부질없음을 밝힙니다.
이어 예수님은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라고 회개를 선포합니다. 이 말은 회개에서 예외인 사람도 없고, 회개가 필요치 않은 사람도 없다는 말인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죄와 멸망」은 관계가 없다는 점을 밝힌 후에 「회개와 멸망」을 연결시킨다는 점, 그리고 후반부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의 열매와 회개」를 연결시키는 점을 참조해서 해석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을 가지고 회개란 말을 해석해보면 회개란 단순히 죄에서의 돌아서는 것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의미를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만 열매를 맺기 위해 지금까지의 삶의 일대 변화 아니면 바오로 사도처럼 가치관의 전향적 변화와 같은 의미가 죄(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잘못과 불법이라는 소극적 의미의 죄)에서 돌아섬 보다는 더 적절한 의미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기에 필자는 오늘 복음을 보면서 생각하는 바는 내가 깨달은 진정 가치 있는 삶을 방해하는 모든 것, 죄 뿐만이 아니라 나의 평범한 일상의 삶마저도 그것이 장해물이라면 매 순간 과감히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가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회개의 삶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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