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안녕하세요?』 『아유, 어여 와』
강명희(세실리아.44.서울 성수동본당)씨가 쪽문을 열고 들어서자 대낮인데도 껌껌한 방안에서는 반가움이 넘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후 전등 아래 모습을 드러낸 강점남(77) 할머니, 어둠 속에서도 용케 강씨의 손을 찾아낸 할머니는 꼭 쥔 손을 놓을 줄 모르고 아랫목으로 이끈다.
『할머니, 오늘은 얼굴이 발그레하시네.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좋은 일은…. 이렇게 찾아주니 그게 좋은 일이지』
『할머니, 저도 왔어요』 『잘 왔어. 공부하느라 힘들지』
강씨 옆에 선 큰딸 안숙희(아녜스.고2)양도 그늘이 느껴지던 방안의 공기를 바꾸는데 한몫하고 나선다. 정겨운 얘기가 오가는 속에서도 강씨는 방안 이곳저곳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다.
『뭐 불편하신 데는 없으세요?』 『없어』
지난 겨울에 들어서면서 오래 전부터 천식을 앓아온 할머니가 걱정이 됐던 게 사실이다. 강씨 모녀가 걱정할까봐 몰래 병원에 입원하고서도 시치미를 떼던 할머니였다. 스스럼없이 오가는 대화가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모습이다. 먼발치서 이들을 바라본다면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라는 사실을 믿기 힘들 정도다.
강씨 모녀가 할머니와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해.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성동노인종합복지관(관장=허근 신부)이 지난 2002년부터 마련하고 있는 「2세대 가정봉사원」 프로그램에 참여한 강씨 모녀에게 할머니가 연결됐던 것이다.
안양은 어머니 강씨와 매주 한두 차례씩 홀로 살고 있는 할머니집을 찾아 말동무가 되어주는 것은 물론 청소와 설거지를 거드는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다. 반찬이나 음식을 나누기도 하고 성탄이나 명절 때는 조그만 마음의 선물을 준비해 전하기도 한다. 친자식처럼 수시로 전화를 해 안부를 묻는 일은 당연한 일처럼 돼있다. 얼마 전부터는 할머니와 함께 장을 보기도 하고 약심부름을 다니기도 한다. 할머니가 없을 땐 문고리에 우유나 요구르트 등 간식을 매달아 놓고 가기도 한다. 이러다 보니 한 식구처럼 느껴지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할머니도 강씨 모녀를 대하는 모습이 따뜻하다.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모은 폐지를 내다 팔아 조금씩 모은 용돈으로 간식거리를 마련해 내놓기도 하고 과자를 준비해뒀다 싸주기도 한다. 설날에는 꼬깃꼬깃 접은 세뱃돈을 쥐어주기도 했다.
『봉사는 무슨, 저는 할머니께 맛있는 것 얻어먹고 놀다가는 셈인데요』
안양의 아양에 할머니와 엄마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날 줄 모른다. 강씨 모녀가 이 활동을 통해 얻는 가장 큰 것은 집에서만 보던 엄마나 자식의 모습과는 다른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다. 안양으로서는 집과 학교만을 오가는 단순한 일과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칫 세상에 눈을 닫을 수 있는 아이들이 세상을 한번 더 들여다보고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 인성교육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처음엔 어색한 면이 없지 않았는데 이젠 한 주라도 거르면 꼭 해야 될 일을 빠뜨린 것 같아 이상하게 느껴져요』
강씨 모녀처럼 각자의 마음에 뿌려져 있는 사랑의 씨앗을 확인하고 키워갈 수 있는 나눔과 봉사의 장은 곳곳에 널려 있다. 지방자치단체마다 대부분 한두 곳의 복지관이나 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관심을 쏟으면 사랑을 나눌 곳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특히 「2세대 가정봉사원」이나 「가족사랑실천단」 등 부모와 자식 2세대가 함께 할 수 있는 봉사는 가정의 위기가 높아만 가는 세태 속에서 가정을 「선행이 쌓이는 작은교회」로 가꿔갈 수 있는 좋은 대안이 되기도 한다.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희망의 씨앗은 바로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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