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과 가톨리시즘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가톨릭」에 대한 본질적이고 원론적인 접근을 시도해 봤다. 이제 관심을 실제 로마-가톨릭 교회로 돌려보기로 한다.
앞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거의 모든 종파들이 「보편적이고 온전하다」는 말뜻을 지니는 가톨릭(Catholic)이라는 표현에 대단한 미련과 애착을 갖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동방정교회와 루터교회는 스스로가 원조(元祖) 가톨릭이라고 자임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보았다.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 「가톨릭」은 로마-가톨릭 교회의 약칭(略稱)으로 통한다. 이제 「가톨릭」은 로마-가톨릭 교회의 공식 브랜드(Brand)이다.
그런데 가톨릭(Catholic)이라는 단어와 병행하여 흔히 가톨리시즘(Catholicism)이라는 표현을 듣게 된다. 이 둘은 같은 말이 아니다. 「가톨릭」이 로마-가톨릭 교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한다면 「가톨리시즘」은 역사의 현장에서 그 로마-가톨릭 교회가 구체적으로 구현하고자 했던그 무엇과 관련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가톨릭」은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가리키는 반면 「가톨리시즘」은 그 사명의 완수를 위해 추구했던 내용과 양식을 일컫는다. 한마디로 「가톨리시즘」은 로마-가톨릭 교회의 역사적 실존양식(實存樣式)을 표현하는 용어라고 볼 수 있다.
좀더 쉽게 설명해 보자. 가톨릭과 가톨리시즘의 관계는 브랜드와 상품의 관계와 비슷하다. 「가톨릭」이 「브랜드」에 상응하는 말이라면 「가톨리시즘」은 그 「제품 및 포장」에 상응하는 말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 회사의 이념과 정신을 나타내는 브랜드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이처럼 「가톨릭」이 함축하는 정신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품과 포장은 시대마다 바뀐다. 바뀌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품질혁신이 없이는 가차 없이 도태되는 것이 역사의 비정한 법칙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가톨리시즘」도 역사 속에서 숱한 변화를 겪어왔다. 때로는 뒤로 때로는 앞으로, 때로는 우로 때로는 좌로, 때로는 폐쇄로 때로는 개방으로, 때로는 부분적 개선(改善)으로 때로는 총체적 혁신(革新)으로, 이리 기울고 저리 치닫고 하면서 걸어온 길이 「가톨리시즘」의 역사적 궤적이었다. 모두가 생존을 위한 상황적인 선택이었다.
가톨리시즘의 구현원리
가톨리시즘은 본연의 구현원리를 지니고 있다. 크게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첫째, 아죠르나멘또(aggiornamento)의 원리이다.
가톨리시즘은 시대적 상황에 적응하며 구현된다. 이를 우리는 아죠르나멘또라 부른다. 「현대적 적응」이라고 번역되는 이 용어는 교황 요한 23세께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슬로건으로 내세우면서 본격적으로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본디 이 원리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명령에 기원(起源)을 두고 있다.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이렇게 하늘을 보고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왜 시대의 징조는 분별하지 못하느냐?』(마태 16, 3).
이는 시대의 징조(signs of time)를 분별하여 거기에서 자신에게 요청되는 사명을 깨닫고 지혜롭게 처신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새로운」 시대는 교회에게 「새로운」 사명과 생존방식을 요청한다. 이는 손수 역사를 섭리하시며 「시대의 징표」를 통해 당신의 뜻을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이다.
그러므로 가톨리시즘은 매 시대마다 「징표」를 읽어내어 그에 상응하는 「현대적 적응」을 꾀한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시대의 변화 속에서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 우호적(友好的)으로 적응하거나 임기응변적(臨機應變的)으로 대응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유행에 편승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시대의 흐름 가운데 교회가 빛(성화직)과 소금(사제직)으로서의 본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원리적(原理的)으로 대처하는 것을 일컫는다.
즉 「영의 식별」 능력(1고린12, 10)으로 대세의 흐름을 읽어내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권고를 따라 「옳고 거룩한」 흐름에 대해서는 기류에 동승하고 선도하되, 「오류와 죄악」의 물살에 대해서는 저지 또는 방향전환을 도모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톨리시즘이 본격적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부상(浮上)한 것은 로마-가톨릭 교회의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 와서였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 시기 가톨릭교회는 오직 성서(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s) 만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고 가톨릭교회를 와해시키던 당시의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을 단죄하면서 전통, 7성사, 성직제도 등을 구원에 불가결한 매개(媒介)로 천명하는 가톨리시즘을 표방하였다. 이후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 1870)는 이에 더하여 로마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을 선언함으로써 폐쇄적 가톨리시즘을 공고히 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트교회를 「갈라진 형제들」로 용인하는 개방적 가톨리시즘에로의 전향(轉向)을 이뤄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시대의 선택을 다른 시대의 「잣대」로 평가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시대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의 논리가 있기 때문이다. 아죠르나멘또의 어려움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둘째, 토착화(inculturatio)의 원리이다.
가톨리시즘은 또한 지역적 상황에 적응하며 구현된다. 이를 우리는 토착화(土着化)라 부른다. 토착화 요청은 1974~1975년에 개최된 제32차 예수회 총회 최종문헌에서 공식적으로 등장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추구된 사안이다. 토착화 모델이랄까 접근법이랄까에 대해서는 나중에 구체적으로 취급될 것이다.
어쨌든 토착화 요청은 각 지역의 사회.문화.정치적 특성에서 비롯된다. 「지혜」를 구하는 희랍인에게 십자가는 한낱 어리석음(1고린 1, 23)이었다. 이와 비슷한 일 곧 가톨릭적 복음과 문화의 충돌은 곳곳에서 발생한다. 아프리카의 어느 지역에서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에게 물을 부음으로 징벌하였는데 이 경우 세례(洗禮)의 의미가 왜곡될 수 있다. 또 중혼(重婚: polygamy)이 미풍양속인 민족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일부일처(monogamy)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가 될 것이다. 한국 교회의 경우 제사문제가 가톨릭 신앙 전래의 큰 걸림돌이었다. 결국, 가톨리시즘이 한 지역에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되는데 「뜨거운 감자」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토착화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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