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에서 물러난 후 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난생 처음 느껴보고 싶었다. 쉰다기 보다는 오히려 느긋하게, 한편 게으름을 피며 한동안 지내보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생각한대로 되지 않을 것 같다. 지난 29년간 몸담았던 사회복지위원회의 역사도 정리해야 되겠고 그동안 관계해왔던 교회 내 여러 기관단체 뿐 아니라 사회의 여러 단체와 복지단체들의 도움 요청도 적잖기 때문이다. 또 원고 청탁이나 강의 요청도 제법 있는 편이다.
이러던 차에 내 삶을 소개하고 싶다는 신문사의 요청이 와 난감한 마음이 앞섰다. 보잘것없고 평범하기만 한 내 삶을 누구에게 드러내 보인다는 게 부끄럽기만 해 몇 차례나 청을 거절하다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말에 용기를 내어보기로 했다.
나의 삶은 평범하고 보잘것없고 내세울 것 없는 것이었다. 이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라면 모두가 살아왔을 그런 삶이었다. 그래서 삶의 여정도 단순하기 그지없을 것 같다. 아마도 삶의 전반기 30년은 준비의 시간이었던 같다. 구교우 집안에서 태어나 엄격한 전통적 신앙훈련을 받았고 젊은시절 누구나 그렇듯이 본당에서 열심히 활동했고 대학 시절에는 가톨릭정신이 흘러 넘치는 대학에서 공부와 신앙생활을 함께 할 수 있었을 뿐이다. 남들처럼 3년 동안 사병으로 고된 군대생활을 했고 미래의 문제에 대해 고뇌도 했을 뿐더러 생활에 대한 현실적인 두려움도 가졌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하니 이 모든 삶의 여정에 그분의 손길과 배려, 그리고 안배가 항상 계셨지 않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나는 1941년 5월 28일 서울 아현동의 산마루에서 태어났다. 선대로부터 독실한 구교우 집안이었기에 태어난 지 얼마 안돼 유아세례를 받았다. 옛날 본당신부님들이 모두 그러셨겠지만 우리 본당신부님도 대단히 대하기 어려운 분이셨던 것 같다. 베드로, 바오로, 요한 등은 너무 흔하니 「폴리카르포」를 세례명으로 부르라는 말씀에 아버지는 순명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세례식을 마친 후 어버지께서 이 귀한 아들의 세례명을 기억해내지 못하신 것이다. 아들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얼마나 곤혹스러우셨을까. 근근히 용기를 내 사제관으로 신부님을 찾아가 농담 섞인 핀잔을 듣고 세례명을 적어오셨다.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공과책을 비롯해 성교요리문답, 요리강령 등 온 집안에 있는 책이란 책에는 내 세례명을 다 써놓으셨다니 태어날 때부터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쳐드린 셈이다.
▲ 1959년 약현성당에서 노기남 대주교로부터 견진성사를 받고 대부님과 함께 기념촬영했다.
할머니의 입에 달린 「예수 마리아」란 말이 정겹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 할머니 손을 잡고 가다 넘어지는 척이라도 할 양이면 어김없이 그 입에서는 「예수 마리아」란 말이 튀어나오곤 했다. 할머니의 지극하신 사랑은 당신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다른 동생들은 제쳐두고 나를 당신 방에서 자게 하실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편애를 받고 자란 셈이어서 동생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없지 않지만 그런 할머니의 사랑 덕분에 하느님께로 향한 삶을 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 감사하는 마음에 고개가 숙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