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있어 가장 하기 힘든 말 중에 하나가 「내가 잘못했다」는 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특히 남자들의 경우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은 심리상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잘못을 인정하기 보다는 덮어두거나 합리화하려 합니다. 그리고 여성들은 실수 자체를 남자들만큼 두려워하지도 않고 때로는 관심을 끌기 위해 잘못과 실패를 자랑하기까지 합니다만, 잘못 자체만을 위해서는 인정하길 싫어한다 합니다. 알아서 용서해주고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잘못을 용서청하지 못한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삶에서 여러 가지 부정적 결과를 낳습니다. 부부들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부부관계란 참으로 묘해서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는 잘못과 그로인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문제는 잘못으로 인한 상처보다도 잘못한 후의 행동으로 인한 상처가 더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상처들도 뻔뻔스러움과 회피하고자 하는 모습 때문에 가슴에 못이 됩니다. 여기에 용서하면 나만 손해 본다는 계산적 마음이 더해 질 때 원망과 미움은 더욱 커지는 악순환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바로 여기서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이 필요하게 되는데 「잘못의 인정과 용서 청함」만이 이런 고리를 해체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은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비유로서 복음서 중 가장 극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작은 아들이 재산을 미리 상속받아 탕진한 후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 아버지께 용서를 청하고 용서를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나오는 큰 아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사들을 상징하고, 작은 아들은 율법 상 죄인들을 뜻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이야기의 뜻은 분명해 집니다. 하느님은 율법을 잘 지키는 큰 아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작은 아들인 죄인들도 회개하면 구원(잔치)을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이 이야기의 목적은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하느님 상을 바로 잡는데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은 하느님은 옳은 일을 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한 사람은 축복해 주시지만 계명을 어긴 사람은 벌하시는 심판자가 하느님이라고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하느님상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이러한 하느님 상에 대한 비판입니다.
하느님은 의인 뿐 아니라 회개하는 죄인들도 받아들이는,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가 우리의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심판이 아닌 사랑, 논리가 아닌 자애, 의인 뿐 아니라 죄인마저도 사랑하시는 분이 우리가 신앙해야할 하느님이시라는 것이 이 비유가 보여주는 뜻입니다.
어떻든 우리는 이 비유를 보면서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을 대할 때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머리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대한다는 것입니다. 이성적 논리나 법리적 규정으로 계산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과 용서, 이해구함으로 사람을 대합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타인을 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데 대한 하나의 해답입니다.
물론 이러한 삶은 쉽지도 않고 약삭빠른 세상에서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관계가 형성된다면 그러한 문제는 극복됩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이와 같은 방식으로 대하면서도 많은 경우 행복을 느낍니다. 그러기에 이 비유의 교훈은 인간은 머리가 아니라 사랑으로 타인을 대해야 하며, 옳고 바른 선행만이 가치 있는 삶이 아니라 잘못의 인정과 용서 청함도 똑같은 가치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주목해야 할 부분은 용서를 청하고자 하는 작은 아들의 모습입니다. 복음에서 관계 회복이 이루어진 것은 아버지의 자비가 가장 중요한 요소이긴 합니다만 작은 아들의 회개와 용서 청함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함이 가져오는 효과를 경험합니다. 가족관계나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용서 청함은 그 모든 잘못과 상처를 넘어설 수 있는 힘을 주는 묘한 능력이 있습니다. 결론은 우리가 작은 아들처럼 용서청하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지만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 청할 수 있을 때, 거기서 자비가 잉태될 것이고, 용서와 자비가 만날 때 우리 삶의 자리는 많은 문제와 상처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행복을 낳는 이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보금자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서 청하는 연습을 하는 한 주간의 삶이되길 기원해 봅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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