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7월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비잔틴교회 책임자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와 교황 바오로 6세(1897~ 1978)가 서로 포옹하고 주님의기도를 함께 바치는 역사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수세기에 걸쳐 이어지던 동방과 서방교회의 분열을 치유하는 몸짓이었으며 이에앞서 1965년 12월 7일 동방교회에 대해 내려진 파문의 처벌(1054년) 철회가 확인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성공적인 결실을 이끌어 낸 것과 함께 동방 교회와의 대화를 통해 교회 일치 토대를 놓고 다른 그리스도교 교회들과 평화 화해를 회복하려 노력했던 점은 바오로 6세의 가장 큰 치적으로 손꼽힌다.
『당신들의 출발은 우리로 하여금 공의회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고독을 느끼게 합니다』
공의회 폐회 직전 갈라진 형제들을 향한 교황의 이같은 발언은 1천년을 넘어서는 동방 정교회와의 분열, 또 수세기 동안 계속된 서방 프로테스탄트와의 갈등 역사안에서 뭉클한 감격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교회 지도자들의 상호 방문 행보는 잦아졌고, 그것은 일치운동의 새로운 분수령이 되기에 충분했다.
1963년 6월 3일 교황 요한 23세가 사망한후 6월 19일부터 시작된 교황선거에서 다섯 번째 투표가 이뤄진 6월 21일, 새 교황으로 선출된 바오로 6세는 등극후 요한 23세 전임 교황의 뜻을 이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성공적 속개를 표명했고 공의회 목표로는 교회 쇄신 및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노력, 현대세계와의 대화, 교황청 구성의 탈(脫) 이탈리아화를 통한 국제화 등을 내세웠다.
교황은 그해 9월 29일 소집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제2차 회기에서 「쇄신된 교회상」을 거의 만장일치로 채택했고 「전례헌장」 「매스미디어에 관한 교령」을 제정 반포했다. 1964년 9월 14일 시작된 제3차 회기는 공의회의 절정을 이룬 날로 평가된다. 이 시기에 교황은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반포를 비롯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동방 교회에 관한 교령」들을 발표했으며 영성체 전 공심재, 미사때의 모국어 사용, 전례쇄신 등을 결정했다.
바오로 6세는 많은 칙서와 헌장 메시지를 남긴 것으로도 손꼽히는데 이는 공의회 결정사항을 교회가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인 동시에 현대 세계에 야기된 여러 문제에 교회가 어떻게 그에 맞갖게 부응할 것인지 고뇌한 흔적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성명을 통해 인구문제 세계 평화문제 과격 민주주의와 인종 차별주의 등을 경고했으며 군비 축소를 호소했다.
첫 회칙 「그분의 교회」(1964년 8월)는 공의회 폐막 바로전 매우 현실적인 언어로 공의회 가르침을 어떻게 실천하고 이를 통해 세상을 변혁시킬 것인지 알려준 문헌으로 눈길을 끈다. 또한 「민족들의 발전」(1967년 3월 26일)에서는 『모든 발전의 중심이 인간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고 노동헌장 반포 80주년을 기념해 발표한 회칙 「80주년」(1971년 5월 14일)은 모든 사람이 정의와 평화 문제 해결에 동참해야 한다는 내용과 함께 가톨릭 사회교리 문헌에서는 처음으로 「환경오염」을 경고했다.
특히 사회 문제에 관한 회칙들 외에 「현대의 복음선교」(1975년 12월 14일)는 세속화된 세계 안에서 효과적인 복음선포와 관련된 기본적 이념들을 설명한 것인데 소위 자유주의 신학이 급속도록 퍼져가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교황의 이같은 입장은 「자유의 개념」 및 선교 활동이 어떤 것인지를 정확하게 제시, 자유주의 신학 방법론 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바오로 6세는 세계 여행을 통해 교황사에 새장을 열었던 인물로도 기억된다. 그는 비행기와 헬리콥터로 사목방문을 한 최초의 교황이며 세계 여러나라를 방문한 첫 교황이다.
1964년 1월 3일간 일정으로 팔레스티나 성지를 방문, 교황사상 처음 성지를 찾은 교황으로 기록됐으며 아시아 지역 방문, UN 본부 연설도 「처음」으로 시도했다. 「바티칸의 포로」에서 해방돼 세계적 복음의 여행자로 나서는 가톨릭 교회 수장의 면모가 부각되는 순간들이었다. 그중에서 성지순례와 UN 방문은 세계사 안에서도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바오로 6세의 빼놓을 수 없는 업적 가운데 하나로 교황청 조직을 국제화 시킨 것을 꼽는데 이는 각 지역교회에 통치권 범위를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또한 과거 이탈리아 출신 성직자들의 독무대가 됐던 성청 요직에 비이탈리아인들을 대거 등용시키는 인사를 감행했으며 1965년 교황 자문기관인 세계 주교대의원 회의를 발족시켰다. 이 결정은 일찍이 로마 교회사에서 볼 수 없었던 사례였다.
추기경 숫자를 늘려 43개국을 대표하도록 하는 등 교황은 추기경 임명과 관련 그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그로인해 추기경 숫자는 140여명으로 크게 증가, 교회의 보편성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됐다. 김수환 추기경의 서임도 이때 이뤄졌다. 결과적으로 1978년 교황의 사망 당시 추기경은 114명이었고 그중 이탈리아인은 28명뿐이었다. 바오로 6세에 의해 추진된 추기경단의 세계화는 곧이어 4백여년의 전통을 깨고 비이탈리아인을 교황으로 출현시키는 극적 장면을 연출시켰다고 볼 수 있다.
현대적 요구사항과 전통에 충실하려는 노력을 보이는 가운데 비오 12세와 요한 23세 전임 교황의 후계자로서 교회를 근본적으로 쇄신하고 전환기 교황으로서 미래를 준비하는, 큰 역할을 맡았던 바오로 6세는 그러나 바티칸 공의회후 교회안에 야기된 일시적 혼란 비난들로 인해 마음 고생도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회칙 「인간생명」과 사제독신에 관한 문헌들이 발표됐을 때는 교황의 무류지권에 대한 직접적 도전을 받을 만큼 어려움을 겪었고 르페브르 대주교와 같은 항명자들로 인한 심적 충격도 컸을 것이라는 짐작도 나오고 있다.
그러한 면들 가운데서도 바오로 6세는 보편교회를 기본적인 복음적 가치로 이끌고자 하는 열망으로 교황직을 지켰으며 혼란의 시대에 신중한 자세로 교회를 이끌어간 교황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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