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차서 국민학교(초등학교)에 가게 되었는데 당연히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했다. 우리 본당은 약현(현재의 중림동)본당이었는데 가명국민학교가 성당 안에 있었다.
매주 토요일이면 어린 우리들은 성당의 차가운 마룻바닥에 줄을 서서 고해성사를 보아야 했고 주일이면 그 마룻바닥에 꿇어앉아 미사 참례를 했다. 국민학교 3학년이 되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이런 생활은 중단되었지만 유년시절에 대한 모든 기억은 신앙생활과 연관되지 않은 게 별로 없는 것 같다.
전쟁이 터지자 우리 가족은 경기도 광주 구산성지 인근의 외갓집으로 피난을 갔다 돌아왔다. 그러나 이듬해 1?4후퇴로 다시 국군이 밀리자 전란이 피해갔다는 충청남도 홍성의 산골로 두번째 피난을 떠나야 했다. 안양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계시던 작은아버지가 마련한 트럭에 우리집 식구를 비롯해 작은집과 고모네 가족 등 20여명이 함께 타고 피난길에 올랐는데, 천안에 도착해 성당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됐다. 성당에 요와 이불을 펴고 잠을 청했는데 옛날식의 엄한 신앙교육을 받은 나로서는 어린 마음에도 미사와 기도만 드리는 성당에서 잔다는 게 불경스럽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홍성 산골에서의 삶은 그야말로 굶주렸던 체험으로 채워지는 듯하다. 남의 집 행랑채를 구해 살았는데 흙먼지가 날리는 흙집이어서 멍석을 깐 후 두툼한 요를 그 위에 덧깔고 지냈다. 내 밑으로만 열명 안팎의 동생이 있는 셈이었는데 배가 고프면 그렇지 않아도 힘들어하실 어른들을 조를까 봐 아침을 먹고 나면 동생들을 이끌고 집을 나와 산이며 들판을 쏘다녔다. 한끼의 부담이라도 덜어드려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이렇게 먹을 게 많을까 싶을 정도로 산야에는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먹을 만한 게 곳곳에 널려 있었다. 참꽃으로도 불리는 진달래꽃이나 열매를 따먹기도 하고 갖가지 뿌리를 캐먹으며 배고픔을 달래다 오후 느지막이 집에 돌아와 호박 등을 넣은 멀건 죽으로 저녁을 때우고 잠자리에 들곤 했다.
전쟁이 끝나고도 우리집 식구들은 곧장 예전에 살던 서울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정부가 한강 건너는 것을 허락지 않아 작은아버지가 계시는 안양에 눌러앉았던 것이다. 안양에서 학교를 다니다 6학년 2학기가 돼서야 서울집으로 돌아왔는데 집은 허물어져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벌써 그 때부터 입시지옥이 있어서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때 이른 홍역을 치러야만 했다. 다행히 서울중학교에 합격해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위기 때마다 주님께서 우리 가족을 지켜주시고 함께 해주셨던 것 같다.
모처럼 안정을 찾아가던 중학교 2학년 어느 날 평생 함께 사실 줄로만 알았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누구보다 나를 아끼고 사랑하셨던 분의 죽음 앞에 내 몸과 마음에는 큰 구멍이 뚫린 듯했다. 그 때부터 나는 거의 매일같이 할머니 손을 잡고 다니던 성당과도 멀어지기 시작했다. 부모님께는 성당에 간다고 말씀드리곤 딴 곳을 쏘다니다 들어오고는 했던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우리 식구들은 만 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저녁이면 온가족이 모여 망과(저녁기도)와 연도를 바쳤다. 보통 1시간이 넘게 걸리는 기도시간 동안 꼬박 무릎을 꿇고 앉아있어야 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싶다. 아버지는 그렇게 고집스러우실 정도로 우직하셨고 효성이 지극하셨다. 그렇게 바친 기도 덕이었을까,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3년간의 냉담 생활을 접고 다시 교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이 또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지극하셨던 할머니의 간구 덕이 아니었을까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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