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세모꼴 두건 카푸치오(cappuccio)가 달린 갈색 수도복을 입어 「카푸치니」(cappuccini)라는 별명을 얻었고 그로인해 「카푸친」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카푸친 작은형제회(Ordo Fratrum Minorum Capuccinorum)」는 「작은형제회」 「꼰벤뚜알 성프란치스꼬회」와 함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따르는 수도회의 한 갈래다.
1528년 관상기도, 고행, 엄격한 가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 헌신 등 창설자의 수도 회칙을 문자 그대로 보다 엄격히 지키려는 수도회 내 개혁운동으로 시작된 카푸친 작은형제회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을 완성시켜 제2의 창설자로 불리는 성보나벤투라, 둔스 스코투스와 같은 훌륭한 신학자를 배출한 수도회로도 유명하다.
카푸친회는 새로운 수도회라기 보다 프란치스칸들 내부에서 지속돼온 개혁들중 하나로 볼 수 있다. 1525년초 이탈리아의 바시오의 마태오가 교황 클레멘스 7세로부터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 규칙을 모든 면에서 엄격히 준수하겠다는 허락을 얻어냄으로써 시작된 카푸친회의 설립은 규칙 준수파들의 광범위한 호응을 불러 일으켰고 클레멘스 7세 교황의 공식 인준과 함께 1536년 바오로 3세가 정식 인가를 내림으로써 자리를 굳히게 됐다.
설립 초기 카푸친 회원들은 고독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 「프란치스칸 은수자」들로 알려졌으나 기존 프란치스칸들과는 다른 수도복과 외형, 즉 끝이 뾰족한 모자와 턱수염 때문에 카푸치노라는 통칭으로 불리게 됐다.
설립 10년만에 12개 관구와 700여명 회원을 가질 만큼 급속한 성장을 보였던 카푸친회는 1538년 총대리로 선출됐던 베르나르디노 오키노가 칼빈주의를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인해 교황청으로부터 모든 카푸친 회원들의 설교 금지, 새로운 공동체 설립 금지 등의 조처를 당했다.
이러한 금령은 1587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해제할 때 까지 지속되다가 1619년 교황 바오로 5세의 칙서로 인해 카푸친회는 작은형제회, 꼰벤뚜알 성프란치스꼬회 등과 같은 조건으로 완전한 독립이 허용된 프란치스칸 가족으로 인정됐다.
이후 카푸친회는 다양한 민족들 문화에 쉽게 적응하는 특유의 장점으로 전 유럽에서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고 그런 면에서 설립 100년이 흐른 뒤에는 1260개 수도원 42개 관구에 1만7000여명 회원을 가진 수도회로 성장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과 삶을 보다 철저히 지키고자 하는 개혁 정신에서 비롯된 만큼 카푸친회의 법적인 구조와 영성은 초기 프란치스칸주의를 충실히 반향하고 있다.
은수 생활, 철저한 가난, 하느님을 향한 자녀다운 사랑과 형제들을 향한 모성의 사랑, 특별히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조건없는 봉사의 사랑이 이들의 두드러진 면모로 드러나고 있다. 특히 프란치스코 성인이 보여주었던 「기도와 은둔」의 생활은 16세기 카푸친 개혁 회원들이 가장 소중히 여긴 가치로 알려진다.
수도회 개념보다 형제회 개념을 중시했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뜻 처럼 카푸친 회원들은 「수사」로 불리기를 원치 않는다. 작은 형제, 보다 더 작은 형제로 살기를 원하며 형제라 칭하는 이들은 사제품을 받은 경우 더 더욱 「신부」라는 호칭은 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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