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와 가톨릭교회의 상호관계를 신학과 사회과학분야의 7개 주제로 나눠 조망하는 학술 심포지엄이 근.현대 한국 가톨릭연구단(연구책임=박일영 교수) 주최로 3월 27일 오후 1시 가톨릭대 성심교정 다솔관 301호와 501호에서 각각 열렸다.
이날 심포지엄은 가톨릭연구단이 한국학술진흥재단으로부터 연구사업비 11억원을 지원받아 2002년 8월부터 2005년 7월까지 진행하는 3개년 연구 프로젝트의 2차년도 연구결과 발표회다. 본지는 이번 「근.현대 사회문화 변동과 가톨릭교회」 심포지엄의 연구 논문 개요를 4주에 걸쳐 게재한다.
■ 일제시대 토착종교와 가톨릭의 만남 - 박일영 교수(가톨릭대학교 비교종교학·연구책임자)
“타종교 대한 포용적 자세 보여”
일제시대 한국 가톨릭교회의 태도는 대체적으로 구한말 교회의 그것과 달라진 것이 없다. 가톨릭교회는 무교, 민간신앙, 전통, 고전종교들에 대해 여전히 이단과 미신으로 치부하는 태도를 견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허용함에 따라, 가톨릭교회는 조상제사에 대한 일종의 조건부 허용을 조치하고, 참배 불가의 완강한 입장에서 「허용」으로 태도를 바꾸게 된다. 계속 신사참배를 거부할 경우 일본 정부와의 관계가 어려워져서 교회의 존립이 위협받게 될 수도 있다는 상황판단을 한 것이다. 이는 교회가 토착종교 일반에 대해 갖는 자세의 변화에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했다.
이러한 가톨릭교회의 태도 변화는 당시 교회의 대표적 내부 문헌인 「경향잡지」, 「서울교구연보」, 「회장 직분」 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문헌들은 토착종교와 관련된 내용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당시 가톨릭교회가 토착종교와 어떤 관련을 맺었으며, 왜 그랬는지를 알아보는데 있어서 필요한 당시 시대상황이나 교회 내부의 사정을 입체적으로 살피는데 도움이 된다. 당시 간행된 「경향잡지」, 「서울교구연보」, 그리고 「회장직분」에는 상당한 분량의 「무당, 여자 무당, 신당, 신병, 푸닥거리, 굿, 부적」 등의 기사들이 등장한다. 모두 합해 20건이다. 일제시대 중에도 주로 전반기에 해당하는 1910년대 초에서 1920년대 말까지 집중적으로 이러한 종류의 토착종교 비판 기사들이 등장하고 있음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이후에 이르면 이러한 비판이나 적대적 발언 기사가 현저하게 줄어들다가, 1939년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됨을 볼 수 있다.
당시 교회가 보여준 이러한 일련의 모습에 대해 이제까지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은 『민족 고유의 문화에 대한 적응이나 토착종교에 대한 관용적 태도에서 내려진 조치가 아닌, 다분히 교회의 안전과 교세 확장을 앞세운 정치적 고려에서 이뤄진 조치』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종교 상호간 이해의 증진 및 문화의 교류」라는 보다 큰 종교문화사적인 흐름 속에서도 주시해야 한다. 즉, 가톨릭교회가 이제까지 완고하게 견지하고 있던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배타에서 포용」으로 나아가는 단초를 제공한 긍정적 부분도 있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일련의 포용적 자세는 신사참배 허용이 당시 보여준 왜곡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포용 정책」을 가져온 긍정적 효과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또 한 가지 짚어 볼 점은 당시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펼치던 독일 베네딕도회와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 노선의 상이점에 관한 것이다. 특히 독일 출신 선교사들은 한국문화에 대해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선교지 민족들의 전통문화를 이해하고 보존하며, 동시에 사회적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선교 사상을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이 일제시대 서로 다른 두 갈래의 교회정책과 선교노선을 이어받은 오늘날 한국의 가톨릭교회나 신자들이 전통문화나 토착종교에 대해 가지는 태도는 「양가감정적인 이중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즉, 한국고유의 토착종교를 한 편으로는 여전히 미신, 우상숭배로 단호히 매도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문화의 모태로 묵시적 인정을 하는 등 애증이 교차하는 것이다.
원래 한국의 종교문화는 포용적인 동양 종교의 특성상 전통적으로 삼교합일(三校合一) 내지는 백교회통(百敎會通)의 사상을 지녀오고 있다. 그 점은 오늘날 한국인들이 이 종교 저 종교를 옮겨 다니거나 한 사람이 여러 종교를 동시에 신봉하고 있다는 통계상 수치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이 무르익어서 한국의 가톨릭교회가 특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이웃종교에 대한 관용이나 종교의 자유, 종교간 대화에 전향적인 자세를 갖게 되었다고 보인다.
■ 교회와 근대적 사회사업 도입과 발전 - 박문수 박사(가톨릭대 전임연구원·실천신학)
“전후 원조통해 복지기틀 마련”
해방공간, 한국전쟁, 4.19, 5.16, 유신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한국현대사에서 가톨릭 사회복지의 성격을 결정한 요소에는 해외원조와 제2차 바티칸공의회, 한국주교회의 인성회(仁成會)의 설립, 방인수도회와 교황청립 수도회들의 한국진출, 교세 증가 등을 들 수 있다. 실제 이 시기에 한국사회를 위한 가톨릭 사회복지의 기여는 전체 100년사 안에서 가장 범위가 넓고, 영향력 면에서도 큰 것이다.
가톨릭 사회복지 전개과정은 미국가톨릭복지협의회(NCWC) 산하 「가톨릭 구제회」(CRS)와 오스트리아의 가톨릭 부인회(오지리 부인회), 독일의 미세레오르 등 해외원조기관과 교황청립 수도회들의 진출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특히 해외원조기관을 통해 동원된 막대한 물적 자원은 당시 한국인들의 생존에 절대적 영향을 행사했으며, 이후의 가톨릭 사회복지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했다.
가톨릭교회는 한국전쟁 후 학교 복구와 교육 재건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특히 간호학교, 기술학교의 설립을 통해 사회적 약자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의료사업은 이 시기에 가장 질적인 발전을 보였는데, 의료사업의 대상을 신자에 국한하지 않고 의료혜택 소외 지역민들까지 넓혀 박애정신을 실천했다. 또 의과대와 간호전문대를 통해 자체 가톨릭 의료인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성 라자로 마을」과 「성심원」을 설립하고 「한국가톨릭나사업가연합회」를 발족시키는 등 구라(救癩) 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아동복지」 사업과 「노인복지」는 대구대교구와 서울성가소비녀회를 중심으로 발전해왔으며, 「노동복지」는 1963년 수원교구가 「안양 근로자 회관」을 설립하면서부터, 또 「청소년복지」는 1955년 성 베네딕도 수도회가 왜관의 순심 중.고등학교를 인수하고 성 바오로 기숙사를 운영하면서 시작됐다. 「재소자복지」는 1970년 4월 서울대교구 교도소 후원회가 발족하면서 첫 발을 내디뎠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영향을 받은 한국 가톨릭교회는 크게 가톨릭 노동운동, 가톨릭 농민운동, 도시빈민 운동 등 세 가지 형태로 사회참여를 전개했다.
교회의 예언직 수행이라 불리는 사회참여는 1967년 가톨릭노동청년회가 개입했던 강화도 심도직물사건에 관한 한국주교단의 공동성명으로 시작되어, 1974년 지학순 주교의 구속으로 발단된 시국기도회를 통해 본격적인 단계에 진입했다. 지주교의 구속은 1974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1975년 한국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특히 사제운동이 중심이 된 민주화 운동은 형태상으로는 예언자적이고, 내용적으로는 고발의 성격을 보였다.
한편 이 시기에 가톨릭과 함께 의미 있는 사회복지 사업을 전개했다고 볼 수 있는 곳은 불교와 개신교에 불과했다. 천도교, 원불교 등도 나름의 노력을 했지만, 실질적인 기여는 개신교와 천주교의 몫이었다. 가톨릭 사회복지는 해방 후에서 해외원조시대 까지는 구호물품을 수령 전달하는 소극적 역할을, 후반에는 교회의 자립기반이 갖춰지면서 자체 자원동원을 통한 복지사업을 확대하는 단계로 이행해왔고, 무엇보다 이 시기에 인권복지 사업이 시작됐다.
가톨릭 사회복지는 사회사업방식의 측면에서 충분히 근대성을 띄었고, 원조를 통한 것이기는 했지만 이후 복지국가의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복지의 근대적 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가톨릭 사회복지는 국가가 감당할 수 없는 「영적 복지」에서부터 국가가 복지적 영역에 추가 자원할당을 할 수 있도록 압력을 가하는 방식으로 실질적 기여를 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한국 교회 자체의 노력이라기 보다는 외생적 변수들에 의해 발전했기에 자립의 토대가 빈약하고, 수도회 중심으로 진행되어 평신도들이 수동적 역할에 머물게 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또 이 시기 이후로 가톨릭교회가 대내적 발전에 치중, 이후 복지 발전에 소홀해진 점도 아쉬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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