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홍운(서울신문 논설위원실장)
“독자의 소리에 항상 귀기울여야”
가톨릭신문 창간 77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가톨릭신문을 발행하고 보급하는 데 열과 성을 다해 수고하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정과 격려의 인사를 드립니다.
가톨릭신문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구원소식을 전하려는 선교사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선교사 열정 확인
가톨릭신문에 대한 모니터링의 기회를 주신 것은 큰 울타리 안에서 「가톨릭 언론인」으로서의 소명과 지향점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가톨릭신문에 바라는 저의 소망은 항상 독자의 요구에 귀기울여달라는 것입니다. 흔히 공급자 위주의 신문을 제작하지 말고 수용자 중심의 신문을 만들라는 얘기를 합니다. 비단 신문 산업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마찬가지일겁니다. 정부의 정책이나 각 정당들의 정치행위와 기업의 제품 생산 등 모든 분야에서 다함께 적용되는 명제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가르침 전해
독자들이 가톨릭신문을 펼쳐 보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저의 짧은 생각으로는 바로 복음, 즉 기쁜 소식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일 것입니다. 가톨릭신문에서 일반 대중지와 같은 기사나 논조를 요구하지 않을 겁니다. 그 특성을 살려 지금도 그같은 편집방향을 정해 독자들의 갈증을 훌륭히 채워주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설을 비롯한 칼럼과 해설기사, 그리고 많은 기획물들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봅니다.
그런 전제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사회적이거나 세계적인 이슈에 대한 가톨릭의 시각을 분명히 밝혀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예를 들어 세계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나 서울대 황우석 교수팀의 인간 배아 줄기세포에 관한 연구 발표와 최근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에 대한 찬반논란 등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과 입장을 잘 정리해준다면 큰 도움이 되지 않겠나 하는 점입니다.
심층 분석기사 필요
물론 단편적인 기사와 해설을 볼 수 있지만 보다 심층적이면서 다양한 분석과 해설, 그리고 기획기사가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인간 배아줄기세포에 관한 문제만 하더라고 황 교수팀이 미국에서 일방적으로 발표하자 국내 언론은 찬양일색이었고 정부는 「노벨상 후원회」를 만들어 지원하겠다며 법석을 떨었습니다. 과연 세계 생명공학계에 우뚝 선 연구결과인지, 아니면 가장 기본인 생명윤리의 원칙을 어기면서 저지른 만행인지에 대한 심층 기획 기사가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교회 내 생명윤리학자들의 글을 싣는 정도로는 부족하고 세계 생명공학계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며 연구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이에 비해 황 교수의 연구는 과연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조명했더라면 독자들의 이해를 한층 도울 수 있었겠다 싶었습니다. 다른 문제도 마찬기지일 겁니다. 사회적인 큰 이슈에 대해 외면하지 말고 교회 가르침에 입각한 적극적인 해설과 보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길잡이 역할 기대
어른이 없고 스승이 없는 사회라고 합니다. 가톨릭신문이 그 길잡이 역할을 한다면 우리 사회의 발전은 한층 앞당겨질 것으로 확신합니다. 현대적인 감각의 세련된 편집과 레이 아웃 등도 가톨릭신문이 반드시 도입해 실현해야 하겠습니다.
■ 김민수 신부(주교회의 매스컴위 총무)
“교회내 대화.비판문화 키우길”
창간 77주년을 맞은 가톨릭신문에 대해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기쁨을 함께 나눕니다. 긴 세월 끊임없는 역사의 도전과 혼란 속에서도 꿋꿋이 교회언론의 정도를 걸어옴으로써 한국교회사뿐만 아니라 한국민족사에 길이 남을 큰 획을 긋는 뜻 있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의 행보를 바탕으로 가톨릭신문은 더욱 발전해가야 하는 사명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가톨릭신문이 주어진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일치와 발전」(1971)에 있는 내용을 통해 몇 가지 제언하고자 합니다. 이 문헌에서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세 가지 방법으로 교회를 도와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자신을 현대 세계에 보여주게 하고, 교회 안의 대화를 증진시키고, 현대의 정신과 사람들을 교회에 소개해준다』(125항). 가톨릭신문에도 이 세 가지 방법을 적용시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가톨릭신문은 교회를 현대 세계에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언론의 대사회적 활동입니다. 교회의 정신과 복음적 가치관을 전하고 증거해야 하며 진실을 왜곡, 은폐하는 사회 언론들에 대한 비판과 대안언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가톨릭신문은 이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가톨릭신문은 교회 안의 대화를 촉진시켜야 합니다. 성직자만의 지면할당이나 의견수렴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대화는 일방적 소통이 아닌 쌍방향으로 인식될 때 성직자,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 더 나아가서 단체와 단체간에 상호작용이 가능한 형식과 내용으로 꾸며지는 신문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가톨릭신문이 해야 할 일은 교회 내에 「비판문화」를 키우는 것입니다. 비판은 남의 잘못만을 가려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닌 「창조적 파괴」의 일종입니다. 비판문화가 형성되지 않고서는 쌍방향의 대화가 어렵습니다.
셋째로, 가톨릭신문은 현대 문화를 교회에 소개하는 창구역할을 해야 합니다. 세계화, 정보화, 다원화된 이 세계에 지배적인 문화는 교회에 조직과 활동에 변화를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급변하는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현대문화를 수용해야 하며, 더 나아가서 교회문화로 토착화시키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가톨릭신문은 이러한 토착화작업을 통해 교회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사목과 선교를 제시해야 합니다.
위에 제시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가톨릭신문은 각 분야별로 평신도 전문가들을 많이 발굴해내고, 그들을 최대한도로 활용하며, 그들을 결집시키는 역할도 해야 합니다. 또한 가톨릭신문사 기자들은 끊임없이 지적이고 영성적인 재충전을 해야 할 것입니다.
창간 77주년을 맞은 가톨릭신문에 대해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기쁨을 함께 나눕니다. 긴 세월 끊임없는 역사의 도전과 혼란 속에서도 꿋꿋이 교회언론의 정도를 걸어옴으로써 한국교회사뿐만 아니라 한국민족사에 길이 남을 큰 획을 긋는 뜻 있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의 행보를 바탕으로 가톨릭신문은 더욱 발전해가야 하는 사명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가톨릭신문이 주어진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일치와 발전」(1971)에 있는 내용을 통해 몇 가지 제언하고자 합니다. 이 문헌에서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세 가지 방법으로 교회를 도와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자신을 현대 세계에 보여주게 하고, 교회 안의 대화를 증진시키고, 현대의 정신과 사람들을 교회에 소개해준다』(125항). 가톨릭신문에도 이 세 가지 방법을 적용시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가톨릭신문은 교회를 현대 세계에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언론의 대사회적 활동입니다. 교회의 정신과 복음적 가치관을 전하고 증거해야 하며 진실을 왜곡, 은폐하는 사회 언론들에 대한 비판과 대안언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가톨릭신문은 이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가톨릭신문은 교회 안의 대화를 촉진시켜야 합니다. 성직자만의 지면할당이나 의견수렴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대화는 일방적 소통이 아닌 쌍방향으로 인식될 때 성직자,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 더 나아가서 단체와 단체간에 상호작용이 가능한 형식과 내용으로 꾸며지는 신문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가톨릭신문이 해야 할 일은 교회 내에 「비판문화」를 키우는 것입니다. 비판은 남의 잘못만을 가려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닌 「창조적 파괴」의 일종입니다. 비판문화가 형성되지 않고서는 쌍방향의 대화가 어렵습니다.
셋째로, 가톨릭신문은 현대 문화를 교회에 소개하는 창구역할을 해야 합니다. 세계화, 정보화, 다원화된 이 세계에 지배적인 문화는 교회에 조직과 활동에 변화를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급변하는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현대문화를 수용해야 하며, 더 나아가서 교회문화로 토착화시키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가톨릭신문은 이러한 토착화작업을 통해 교회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사목과 선교를 제시해야 합니다.
위에 제시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가톨릭신문은 각 분야별로 평신도 전문가들을 많이 발굴해내고, 그들을 최대한도로 활용하며, 그들을 결집시키는 역할도 해야 합니다. 또한 가톨릭신문사 기자들은 끊임없이 지적이고 영성적인 재충전을 해야 할 것입니다.
■ 강영옥(가톨릭대 전임연구원)
“미래 여는 창조적 역사관 필요”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와 더불어 성장해온 가톨릭신문의 창간 77주년을 축하드립니다. 가톨릭신문은 우리의 근현대 역사 속에서 교회의 역할과 사명을 대내외적으로 알리는 시대의 파수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과거를 자축하기 이전에 미래의 시선에서 몇 가지 제언을 올리고자 합니다.
1. 가톨릭신문은 현재의 역사를 기록, 전달하는 데 머물지 말고 미래를 여는 창조적 역사관을 지녀야 한다고 봅니다. 현재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일이 물론 언론의 역할이지만, 가톨릭신문은 교회의 사명과 역할을 일반인들에게 알리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한 교회의 목적에 부합하여 가톨릭신문은 하느님의 뜻을 이 세상에 알리고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그 시대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식별해내는 예언자적 능력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알리기 위해 고난을 받고 때로는 죽음을 당하기도 합니다. 가톨릭신문이 그러한 예언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와 사회에 대한 비판 기능을 상실한 언론이라면 미래를 열어갈 능력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언자의 소명도 저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가톨릭신문은 하느님 백성의 대변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하느님 백성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그동안 가톨릭신문은 성직자의 대변자 역할을 지나치게 많이 해온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평신도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신도의 생각과 느낌과 갈망을 그들의 입장에 서서 전달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주보의 확대판이나 교회관보의 성격을 탈피하여 하느님 백성의 진정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는 매체가 되었으면 합니다.
3. 가톨릭신문은 우리 사회와 가톨릭 교회를 이어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복음화는 그 시대 그 지역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교회는 사회와 유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시대 사회 안에서 교회의 역할과 사명을 항상 돌아보고 재조명해야 합니다. 그동안 가톨릭신문은 교회를 중심으로 사회를 바라보았지 사회 안에 있는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가톨릭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평가들을 전해줌으로써 교회가 늘 깨어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4. 가톨릭신문은 현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전달해야 합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교회에 등을 돌리는 것은 그들의 정서와 감각이 교회 안에 수용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은 놀랍도록 변화되고 있는데 비해 교회는 예전의 모습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늘 새롭게 쇄신되면서 젊음은 유지할 수 있도록 가톨릭신문은 급변하는 시대적 흐름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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