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는 교회 쇄신과 민족복음화를 기치로 내걸고 1984년 5월 「한국천주교 선교200주년 사목회의」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가 함께 자리한 가운데 개최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국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가 한 자리에 모인 이 회의는 1980년 11월부터 1984년 12월 1일 폐막까지 4년여의 준비기간과 본회의를 거쳐 12개 의안을 그 성과로 내놓았다.
가톨릭신문사는 올해로 20주년을 맞은 이 기념비적인 회의와 그 성과로서 의안들이 오늘날 우리 교회와 사회가 직면한 도전과 과제들을 해결해나가는데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성찰하고자 한다.
지난 호(4월 4일자) 창간 77주년 특별 좌담을 통해 이미 그 취지와 방향을 제시한데 이어 이번 호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사목회의 20주년 특별기획이 한국교회의 새복음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질책을 바란다.
특별히 이번 호부터 3회에 걸쳐, 당시 200주년 사목회의의 실무를 책임지고, 12개 의안작성의 전체적인 업무를 총괄했던 의안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정의채 신부의 특별 기고를 게재한다.
이런 제목의 글을 쓰려니 만감이 교차함을 느낀다. 그것은 만 4년여 물불을 가리지 않고 위원장 박정일 주교님을 모시고 현장의 책임을 지고 뛰며 동료 신부님들과 수도자 평신도들이 한 몸처럼 200주년 한국교회 사상 초유의 사목회의 의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목회의의 정식 출발은 1980년 11월 가을 주교총회에서 박정일 주교님을 위원장으로 200주년 기념회의를 발족시키면서부터였다. 1980년 12월 28일에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 사무총장이었던 정은규 신부(현 몬시뇰)의 주선으로 몇 사람이 모여 간담회를 하였다. 그리고 81년 1월 10일 첫 정식 회합을 갖게 되었다. 이 회합에서 문제가 된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였다. 한국교회로서 이런 회의를 전에 해 본 일도 없고 외국에서도 전국 규모의 이런 회의을 했다는 것이 알려진 바도 없었기 때문에 난감했다.
우선 명칭을 서구 명칭을 벗어난 우리 표현으로 하자는 제안이 받아들여져 사목회의로 하였다. 이런 회의의 명칭은 공의회(concilium)와 요즈음 흔히 쓰는 교구차원의 시노드(synodus)가 있는데 하나는 라틴말이고 하나는 그리스말이다. 성 토마스는 두 낱말을 동의어로 쓰고 있다.
물론 지금은 하나는 공의회로 다른 하나는 주교대의원회의, 교구대의원회의, 전국교회회의, 교구교회회의 등 여러 갈래로 쓰고 있다. 어느 회의건 교회가 하는 회의는 사목회의 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사목회의라 하였다.
막상 그런 회의의 방법과 내용은 전례가 전혀 없어 정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우선 내용으로서는 전국의 교구차원과 수도회 그리고 정식으로 인정받은 평신도 단체와 여타 단체들에게 안건을 의뢰키로 했다. 일부에서는 어떤 가이드라인 같은 것 즉 큰 선은 그어주어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도 있었으나 해당 단체들이 자유롭게 의사표시를 하되 회의를 통한 의견 즉 백지상태로 풀뿌리에서부터의 안을 요구하는 공문을 윤공희 대주교님(당시 200주년 기념 준비 주교위원회 위원장) 명의로 3월초 발송하였다.
그러나 한 건의 회신도 없었다. 그것은 해당 단체나 기관들이 전혀 그런 회의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그 회의가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를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위원회는 좀 더 상세하게 그러나 그 중대성을 더 부연 설명한 공문을 윤 대주교님 명의로 다시 보낸 결과 그해 6월말까지 313건의 제안이 접수되었다. 그 내용들은 진지한 토의를 거친 것들이었으며 당시의 교회문제 전반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 방법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이며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런 출발은 전국의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 사이에서 자발적 동참의 분위기를 유발했으며 결국 그 후 여러 형태의 회합들을 통해 이런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어 중앙위원회에서는 주체키 어려울 정도로 그 열기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충천하게 되었다. 이런 참여의식을 등에 업고 사목회의는 진행되었다.
위에서 말한 313건의 안건이 아래에 제시되는 바와 같은 12개 의제로 집약되어 200주년기념주교위원회에 제출되었고 같은 해 12월 7일에 7∼8명의 위원들이 윤 대주교님으로부터 추가 임명되어 작업을 계속, 드디어 1982년 1월 7∼8일 회의에서 12개 의안준비위원회가 발족케 되었다. 2월 13일에는 각 분과마다 10∼15명 정도의 전문위원들이 위촉되었으며 현장의 실정에 기초한 사목회의가 되기 위해 사회조사부가 신설되었다.
이렇게 꼴을 갖춘 의안준비위원회는 같은 해 3월 1일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학교 신학부에서 약 80명의 분과위원장, 전문위원들(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대표)이 전국에서 모여 성대한 미사를 갖고 세미나를 개최, 「2백주년 기념 사목회의의 전망과 방향」이라는 주제의 부위원장 정의채 신부의 발표를 듣고 분과토의를 가졌다. 이렇게 의안준비위원회가 내실 있으면서도 각 위원들의 투철한 사명의식과 결의 속에 첫걸음을 내디뎠다.
의안준비는 지난 근 1년간 작업된 의제를 바탕으로 각 분과 위원들과 전문위원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과 문헌에 근거하여 세계교회에서 전개된 몇 가지 범례들 즉 미국교회의 흐름, 독일교회의 방향, 세계에서 두 번째로 열렸다는 동경교구시노드 등을 세미나를 통해 참고하고 국내 교회현실과 사회현실을 폭넓게 또 심도 있게 연구 분석한 의안을 작성하였다.
독일교회는 역시 개신교발생으로 교회분열의 아픔을 갖고 있기에 일치운동이 중점인 것이었고, 미국교회는 건국 200주년을 앞둔 국민적 화합과 성소격감과 청소년 이탈로 인한 교회의 공동화현상이 그 주요과제인 것이었고, 세계에서 그때까지 가장 잘 됐다던 영국의 전국사목회의(1978∼1980, 리버풀 Liberpool 1980)는 필자가 직접 영국을 방문해 주도적 역할을 한 분들과의 대화 현장견학 등을 하였다.
영국교회 회의의 과제는 그 때 옛 영국 식민지로부터 유입되는 수많은 유색인종들의 의식주의 문제와 가정, 교육, 사회보장, 취업, 인권 등등의 문제였다. 물론 이런 문제의 해결을 정부와 국교인 성공회와의 긴밀한 연대로 하고 있었다. 영국의 사목회의는 본당의 소그룹을 활성화, 이웃사랑의 열기로 이런 문제들을 푸는데 큰 공헌을 하고 있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몇 년 후 세계에서는 두 번째로 교구시노드를 열었다는 동경대교구 시노드의 주안점은 당시 일본사회에 큰 문제로 등장한 윤리퇴폐문제와 그런 위기를 조성한 매체문제였다. 또 다른 면으로는 경제의 놀라운 발전에도 불구하고 깊은 그늘 속에 있는 불우한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뻗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를 전면에 부각시켜 교회와 사회의 큰 관심을 사고 있었다. 물론 이런 여러나라 교회회의들도 교회의 사목전반을 점검 쇄신하려 한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우리 사목회의는 이런 세계교회의 움직임을 위한 세미나도 병행하여 국내 뿐만 아니라 세계에도 열린 한국 교회상을 미래지향적으로 정립코자 노력하였다. 이런 움직임은 교회뿐만 아니라 일반사회에도 큰 관심거리가 되어 도하(都下) 일간지들의 뉴스거리였다.
이렇게 마련된 시안을 1983년에서 1984년 5월 교황님 내한 전까지 전국교구들과 수도회, 각 단체들의 현장에서의 심의기간으로 하였다. 각 교구에서는 지역구 더 나아가서는 본당 단위에서까지 세미나에서 토의하였고 또 한편 그리고 어촌, 농촌, 광산촌, 공업지대, 직능별 사목 여성, 아동, 노인, 이주사목, 군사목, 특수사목 등등 당시 한국교회가 안고 있던 사목의 모든 분야에 걸쳐 빠짐없이 의안에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수도단체들과 평신도단체들은 그들 나름대로 의안 작성에 적극 협력하였다. 가장 중요시 된 것은 교회 삶의 현장에서, 있는 그대로의 실상이 반영되는 점이었으며 이 점에 있어 사회조사 또한 큰 도움을 주었다. 경제부흥과 노사갈등, 도시화현상, 빈부의 격차, 군사독재, 부채, 정치의 소용돌이, 젊은이들의 데모함성 등등으로 많은 혼란과 격동 중에서 이루어지는 사목회의였기 때문에 이런 점 등에도 사목적 지대한 관심과 대책에 부심하였다.
남북분단의 민족적 비운에도 유의하였다. 교육현장과 청소년들의 퇴폐에로의 흐름에도 각별히 유념했다. 교구단위, 수도회, 평신도 단체들에의해 만들어진 의안들은 가끔 상충되는 것들도 있고 서로의 이해와 공동체성의 심화를 위해 몇 번이고 중앙위원회 주선으로 전국 대표들의 연수회를 갖기도 했다.
이 사목회의는 한국 선교 300년대를 향하는 미래지향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전통 문화의 흐름 속에서 교회의 토착화와, 세계화의 맥락에서 이 땅에서의 생동하는 교회상을 구현하려 하였다. 이 토착화의 문제는 200주년 사목회의가 이 땅에서의 사목회의이기 때문에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전례, 사회를 위시하여 모든 의안의 저류를 흐르는 명제였다. 평신도 의안에서는 토착화가 큰 항목으로 다루어졌다. 이런 교회의 토착화 사상은 한국사회 전반에 토착화 사상을 고취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런 모든 것을 이루어가는 데는 교회의 충만한 생명력이 전제되기 때문에 먼저 사목회의는 내성(內省)함으로써 영성의 충만을 기하고 그 힘을 밖으로 뿜어내 이 땅의 하느님 나라 도래와 계시의 빛으로 민족문화를 조명 고양시키려는 의도에서 「민족복음화와 민족문화창달」이라는 간명하면서도 강력하고 교회 내외에 호소력 있는 표어를 붙였던 것이다. 마치 바티칸 공의회가 세상에 열린교회, 아죠르나멘또(aggiornamento)를 표방하여 세계의 공감을 샀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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