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는 두 진영으로 나눠져 거의 무한대의 군비경쟁에 돌입했다. 대량살상무기의 개발과 생산에 천문학적인 재화와 인력이 투입되는 그 한편에서는 기아와 질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이른바 「냉전」(Cold War)의 시대였다. 이제까지의 전쟁과는 양상을 달리하는 냉전에 인류는 자칫 인류 공멸이라는 일촉즉발의 경계선에까지 가면서 비극적인 대립의 시대를 걸었다.
바로 이때 현대 교회와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카롤 보이티야 추기경이 제264대 교황으로 선출됐다. 1978년 10월 16일 콘클라베가 열리고 있던 시스틴 성당의 굴뚝에서 새 교황의 탄생을 알리는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의 주인공은 바로 공산국가 폴란드 출신의 추기경이었다. 무려 455년만에 탄생한 비이탈리아계 교황, 더욱이 냉전의 시대에 공산국가 출신의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된 것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의 섭리를 떠올렸고, 놀라움을 뒤로 한 채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행동하는 교황
신의 섭리는 위대했다. 냉전의 시대에 탄생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하느님의 뜻대로 인류의 양 진영이 화해하고 대립과 대결의 시대를 종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 던진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였고 실제로 동서 냉전의 빙하를 녹이는데 실제적으로 기여했다.
1979년 즉위 다음 해에 교황은 역사상 처음으로 공산국가인 모국 폴란드를 방문했고 이어 83년과 87년 두 차례의 추가방문에 나섰다. 특히 89년 12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와의 세기적 만남은 반목과 냉전의 시대를 청산하는 디딤돌이 됐다. 교황은 90년 4월 또 다른 공산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를 방문했고 98년에는 역사적인 쿠바 방문에 나섰다.
이른바 「행동하는 교황」, 「평화의 사도」로 불리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세계 순방은 끝없이 이어졌다. 97년에는 레바논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지역을 잇달아 방문했고 대희년에는 성지를 방문해 세계의 화약고 중동지역의 평화 정착을 위한 전기를 마련했다.
▲ 98년 역사적인 쿠바 방문에 나서 카스트로를 만나고 있는 교황. 「행동하는 교황」, 「평화의 사도」로 불리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세계 순방은 끝없이 이어졌다.
이제 교황의 남은 순방지는 중국과 러시아이다. 중국은 장차 세계의 중심이 될 아시아, 그 중에서도 엄청난 인구와 영토, 거의 무한의 잠재력을 지닌 곳이다. 그래서 중국은 새 천년기의 중심이 될 아시아의 복음화에 있어서 가장 큰 과제로 꼽힌다.
교회사 안에서 분열의 뼈아픈 역사를 그대로 지니고 있는 러시아 방문도 교황의 가장 큰 염원 중 하나이다. 아직은 정교회와의 관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지속적인 화해의 노력으로 그 길을 앞당길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죽음을 넘나들고
세상을 주유하는 교황의 발걸음은 때때로 죽음의 문턱으로 안내하기도 했다. 81년 5월 저격범의 흉탄에 쓰러진 교황은 두 번에 걸친 대수술과 93일간의 입원, 장기간의 요양을 필요로 했다. 92년에는 담석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아야 했고 94년에는 숙소에서 넘어져 해외 순방을 연기할 만큼 심각한 수술을 받기도 했다.
교황은 이제 80세를 훌쩍 넘은 고령,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어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하지만 파킨슨씨병과 관절염 등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교황은 여전히 세계를 무대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 재위 중 가정 극적인 순간의 하나가 바로 대희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요한 바오로 2세는 즉위 당시부터 이미 대희년의 역사적인 순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1999년 12월 24일 자정,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육중한 청동 「성문」(the Holy Door)을 활짝 열어젖히며 2000년 대희년의 문을 열었다. 이미 1994년 교서 「제삼천년기」(Tertio Milennio Adveniente)를 반포해 대희년 준비에 나선 교황은 2천년 교회 역사를 성찰하고 새로운 천년기를 맞기 위한 대희년 기념행사들을 다채롭게 마련했다.
한편 교황은 재위기간 중에 엄청난 문헌들을 쏟아냈다. 한결같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이 문헌들은 그 시대에 요청되는, 그리고 시대를 초월하는 불변의 진리를 담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새 천년기를 열면서 구상하는 미래는 대개 세 가지로 요약된다. 종교간 대화와 그리스도교 일치에 대한 관심, 정치적 개념을 뛰어 넘어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가치, 그리고 문화와 신앙의 교류 등이 그것이다.
냉전이 끝난 후에도 여전한 분쟁과 갈등, 무차별의 테러와 이에 대응하는 또 다른 폭력이 오늘날 세상에 난무한다. 평화의 사도로서, 가톨릭 교회 뿐만 아니라 인간과 세상의 지도자로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비록 허약해진 육체이지만 오히려 그 유한성으로 인해 발휘되는 하느님의 섭리를 통해 교회와 세상을 여전히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