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후의 궁핍함을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에겐 배고픔이 얼마나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지 설명해도 잘 모를 것 같다.
당시 어려움에 처한 많은 이들이 성당을 통해 미국교회로부터 온 구호물자를 얻어다 생활을 하곤 했는데 서울 아현동집으로 돌아온 후 우리 가족도 자연스레 그 대열에 끼게 됐다. 한번은 할머니께서 벽돌처럼 생긴 누런 것을 먹을 것이라며 얻어오셨다. 기름종이를 뜯어보니 썩은내가 진동을 해 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기다렸다 의논을 드렸다. 아버지도 그런 건 처음 보시는 터라 미국에서 몇 달 동안 실려오느라 상한 것 같다며 먹지 말라고 하셔서 갖다버렸던 적이 있다. 그게 치즈라는 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제대로 먹지 못하고 배우지 못해 겪어야 했던 곤란이 어디 이런 일뿐일까 싶다. 어른이 되서야 이런 구호활동을 벌인 곳이 미국 주교회의 해외원조기구인 가톨릭구제회라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내가 나중에 이 곳에서 일하게 될 줄이야 당시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약현본당에서 분리된 아현동본당을 다녔다. 이 때 내 삶에 있어 중요한 이들을 만나며 다양한 체험을 하게 된다. 고3 때도 꼬박 성당을 오가며 예의 열심한 신앙을 새롭게 다져가고 있었는데 하느님은 어떤 뜻에서인지 시련을 안겨주셨다. 돌이켜보면 너무 자신했던 탓도 컸겠지만 그만 대학 입학에 실패했던 것이다. 낙담하고 있던 차에 담임선생님께서 신촌에 외국인들이 와서 새 대학을 세웠다는 데 그들에게서 배워보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고 권해주셨다. 처음엔 별로 눈에 차지 않았으나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곳이라는 말에 귀가 틔어 지금의 서강대학교에 들어가게 됐다. 이렇게 서강대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지금 생각하면 주님의 안배가 아니셨을까 싶다.
당시 서강대는 미국 위스콘신관구 예수회 신부님들이 운영을 하셨는데 처음 맞아들이는 제자들이라 그러셨는지 사랑 받는다는 걸 느낄 정도로 아주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나는 늘 관심을 가져왔던 중세 역사를 공부하고 싶어 사학과에 들어갔는데 학교에서 생활하다 보니 학과 공부보다는 철학과 신학 공부에 더 열심인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이 시기 4년간 배웠던 신학과 철학, 라틴어 등이 이후 내 삶의 형태나 가치관을 정립시켜 나가는데 중요한 몫을 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서양 신부님들로부터 스콜라철학을 배웠는데 당시로서는 최신의 신학인 셈이어서 배울 때마다 놀라움이 컸던 기억이 난다. 돌이켜보면 이 때부터 마음으로만 해오던 신앙생활을 머리로 해석하고 지성으로 점검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지금도 서강대가 「서강고등학교」로 불릴 정도로 엄격한 교육을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듣고 있지만 아마 우리가 학교를 다닐 때에 비하긴 어려울지 모르겠다. 막 학교를 시작하던 초기여서 그랬을 법하지만 당시 신부님들의 학사관리는 철저하다 못해 엄격하다고 할 정도였다. 강의 시작종이 울리면 강의실 문을 잠가버려 조금이라도 게으름이나 늑장을 피울 수 없었다. 또 숙제는 웬만한 고등학교보다 많이 내주는 등 고통스러울 정도로 훈련을 시키셨다. 그러나 돌아보면 이런 가혹한 교육 속에 혼신의 힘을 다하는 사랑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서강대에서 배웠던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영어였다. 당시 영어를 원어민으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저학년 때는 주로 대화체의 구어영어를 배웠지만 고학년이 되면서 인문과목 강의 대부분을 외국신부님과 신학생들로부터 영어로 들었다. 이때 배운 영어가 지난 30여년간 사회복지위원회 활동 속에서 원활한 국제 관계를 이루어 가는데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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