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가톨릭 신심과 그 역사적 배경 / 최경선
“정치적 혼돈 속 신심 깊어져”
찬미·반공주의로 성모·순교신심 강조
정치적 영향 받은 신심운동 반성해야
1945년 광복부터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년) 이전까지 약 20여 년간에 이르는 시기는 국가나 교회에 있어서 참으로 혼란한 과도기였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친미 반공주의에 일조하며, 성모 신심과 순교자 신심을 강조하는데 주력했다.
성모 신심은 공교롭게도 성모승천축일인 8월 15일에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된 것이 계기가 되어 더욱 번성했으며, 특별히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의 성심께 대한 신심이 당시의 가장 대표적인 신심이었다.
1945년 대구 신암동성당 등 이 시기의 상당수 성당들이 성모 마리아를 주보 성인으로 모셨으며, 성모성과 성모 동굴의 설립도 이어졌다. 또 전국의 여러 성당에서 성모 마리아와 관계된 신심단체들이 결성됐다. 특히 1953년 「레지오 마리애」가 한국교회에 진출하면서, 성모신심 발전에 큰 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순교자 신심은 해방을 맞아 더욱 활성화됐다. 1946년은 김대건 신부의 순교 100주년이 되는, 또 1950년은 79위 복자 시복 25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에 이때를 전후해 순교자 신심운동이 크게 장려됐다. 1946년 9월 16일 「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가 재발족되고, 이에 앞서 같은 해 4월 방유룡 신부가 「한국순교복자수녀회」를 창설한 것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순교자 신심은 기념비 건립 등을 통해서도 표현됐는데, 1946년 김대건 신부 탄생지 솔뫼에 기념비가 건립되고, 1949년과 1956년 각각 새남터와 절두산 부지를 마련한 것은 깊은 의미를 갖는다.
신심 운동은 성체 거동 행사와 본당 건축, 북한 교회(혹은 평화)를 위한 기도를 통해서도 나타났다. 당시 신자들은 조국과 세계 평화, 특별히 교회의 안전을 기원했으며, 한국교회의 평화를 위해 「평양교구 봉헌문」을 아침저녁으로 봉헌하기도 했다. 특히 대구에서는 전쟁 직후 현지 신자들과 피난온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매일 오후 계산동성당에 모여 「평화 신공」을 바치기도 했다.
성체 신심도 꾸준히 이어졌는데,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는 전쟁 기간 중에도 성체강복과 성시간을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충북 음성의 감곡성당은 본당 차원에서 성체 거동 행사를 지속적으로 펼쳤다.
특히 당시 교황 비오 12세는 1954년을 「성모 성년」으로 선포하고 1946년 9월 16일을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 축일」로 지정하는 등 이 시기에 한국교회가 성모 신심과 순교자 신심을 강조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국교회의 지도자였던 노기남 주교 역시 교회 안팎의 모든 긍정적인 사건을 「성모 마리아의 돌보심」의 결과로 돌리는 등, 신자들로 하여금 성모 신심과 한국 순교자에 대한 신심을 통해 기도할 것을 강조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한국전쟁을 「공산주의와의 십자군 전쟁」으로 해석했다. 전쟁은 성전(聖戰)일 수밖에 없으며, 국군과 유엔군은 당연히 「십자군」이 된다는 논리였다. 동시에 신자들은 불가피하게 「전사」가 돼야하며, 교회는 「투쟁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 거듭 강조됐다. 이 기간 중 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간행물은 「경향잡지」와 「천주교 회보」(현 가톨릭신문)였다. 신자들은 이들을 통해 교회의 소식을 접하고 신심 생활의 지표를 얻을 수 있었다.
전쟁기간 중에도 신자들은 깊은 성모 신심과 순교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극단적인 반공주의 입장에서 성모.순교자 신심을 해석함으로써 분단의 위기에 놓여있던 국가 상황을 더 어렵게 하고, 순교자 신심을 장려하면서도 오히려 그러한 움직임에 의문을 품게 할 만한 「경배없음(NONCULTU)」 조사를 시행하거나 「순교자 현양회」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던 윤형중 신부를 갑자기 전근시켰으며, 또 반공주의와 연결된 신심운동이 신자생활에 얼마나 큰 영향과 의미를 주었는가에 대한 의문점들은 반성과 함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이다.
▲ 성모·순교·성체신심 등은 한국교회 대표적 신심운동으로 자리잡아 왔다. 사진은 본당차원에서 성체거동행사를 지속적으로 해온 청주교구 감곡본당.
■ 역사적.비판적 성서연구방법론과 한국 교회의 근대화 (1) / 이성우
“합리적 근대.계몽정신 수용”
근대적 연구 방법론 교회 근대화에 영향
우리말 번역, 교육 통해 성서운동 가속화
현대의 대표적인 성서 연구 방법은 「역사적.비판적」 방법이다. 「역사적.비판적」 성서연구란 성서를 역사적인 관점과 비판적인 시각으로 연구하는 방법으로, 이 방법은 성서의 본문 중에서 역사적인 사실을 탐구함과 동시에 서구의 근대정신이 그 뿌리를 두고 있고, 정치, 사회, 문화의 근대화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덧붙여 이 연구방법은 어떤 한 학자에 의해 설계되고 발전되어 온 것이 아닌 200여년 동안 여러 학자들의 생각과 시대정신이 녹아 있는 방법론이며, 성서의 본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변화된 시대정신의 잣대로 성서를 연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관심사는 성서해석의 주된 방법으로서의 역사적.비판적 방법론 자체에 대한 연구에 있지 않고, 근대정신에 발로한 「근대적」 성서연구 방법론으로서의 역사적.비판적 방법과 한국 가톨릭교회의 「근대화」 사이의 연관성에 있다. 이를 밝혀내기 위해 서구의 근대정신과 역사적.비판적 성서 연구 방법론의 태동 및 발전 역사를 살펴보고, 이 방법론의 수입과 한국 가톨릭교회의 근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그렇다면 한국 가톨릭교회의 성서학은 역사적.비판적 성서연구 방법론을 단순히 하나의 성서 연구 방법론(주된 학문 이론)으로 수입했는가, 아니면 그 방법론의 뿌리에 자리잡고 있는 근대정신도 받아들였는가?
한국 가톨릭 성서학계가 받아들인 성서연구 방법론은 근대정신이 원동력인 과학적.역사적 사고방식에서 출발한 역사적.비판적 방법론이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서학계는 실질적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역사적.비판적 성서연구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수용 발전시켰고, 한국 가톨릭교회는 1960년대 후반 서구에서 그 방법론을 수학하고 돌아온 소수 학자들을 통해 그 방법론을 받아들였다. 즉, 한국 가톨릭교회에 역사적.비판적 성서연구 방법론이 소개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다.
그들은 성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고, 이 성서의 우리말 번역이 미친 영향은 막대하다. 성서를 우리말로 번역함으로써 성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지 않은 사람들도 성서를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고, 성서 교육을 통해 성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한국 가톨릭교회의 성서에 대한 관심은 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이는 전적으로 성서의 우리말 번역과 역사적.비판적 성서 연구를 통한 성서 교육의 공으로 평가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말 성서의 보급과 성서교육을 통한 「성서운동」은 80년대부터 급속도로 확산된다. 가톨릭 성서 모임에 의해 1981년 개발된 성서 통독 프로그램인 「성서 40주간」을 필두로, 1983년 까리따스 수녀회의 「여정 성서 모임」과 포교 성 베네딕도회 대구관구의 「어버이 성서모임」, 1988년 서울대교구의 「청년 성서 모임」과 「성서 못자리」 등이 생겨났다. 성서운동의 확산과 더불어 1973년 「성서와 함께」, 1983년 「생활성서」, 1994년 「야곱의 우물」 등 성서 관련 잡지들이 창간됐다.
이렇게 한국 가톨릭교회의 성서운동은 지난 30여 년 동안 놀라운 속도로 확산됐고, 그와 함께 성서 읽기 및 쓰기와 성서교육은 매우 활성화됐다. 이는 역사적.비판적 성서연구에 의한 성서번역과 성서교육이 그 모든 성서운동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한국 가톨릭교회 내에서 지난 30여 년 동안 일어난 성서운동 내지 성서에 대한 커다란 관심과 가톨릭교회의 「근대화」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역사적.비판적 성서연구는 합리적이고 역사적인 근대정신 뿐 아니라 계몽적인 정신도 배어있다. 성서에 대한 합리적인 비평을 한다는 점에서 역사적.비판적 성서연구는 근대적인 성서학이다.
▲ 우리말 성서보급과 성서교육을 통한 「성서운동」은 80년대부터 급속히 확산됐다. 사진은 서울 청년성서모임 30돌에 정진석 대주교가 봉사자에게 배지를 수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