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의 자각
이제 사목회의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개된 양상을 조감해본다.
교회 전반, 성직자와 수도자를 비롯해 평신도의 정신과 위상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사목회의로 말미암아 한국교회, 특히 평신도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 힘차게 일어섰다. 그것은 성직자 권위 위주의 교회상에서 성직자는 사랑의 봉사자로 자각하게 됐고, 평신도는 자신들의 신분, 즉 자신들의 의무와 권리의 자각이었다.
평신도들은 자기들이 바로 교회라는 의식을 자각하게 되었다. 깊은 신심을 갖고 사회 각 분야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거나, 사회 전반에 폭넓게 산재해 있으면서도 교회 안에서는 수동적이고 일방적이었던 상태에서 주인의식을 갖고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된 것이다.
평신도들은 자기들의 모든 능력으로 의안 작성에 협력해 평신도들의 중요성을 교회 전반, 특히 성직자들이 실감케 했다. 다가올 3천년대는 인류 공통 문화의 형성 시기이기에 먼저 그리스도교 전통 문화 속에서의 토착화 제시가 반드시 필요했다. 사목회의는 그 어떤 사상이나 흐름보다도 교회를 위해 또 이 민족을 위해 정신적으로, 실천적으로 토착화의 씨앗을 광범위하게 뿌렸으며 유교, 불교 등과의 사상 교류는 물론이고 제사 허용과 새로운 한국적 전례 모색 등을 통해 이 땅 전체에 토착화의 큰 물결을 일으켰다.
이 사목회의 의안 작업 기간 동안 많은 평신도 인재들이 발굴됐다. 그들은 그때까지와는 달리 자발적 열성으로 사목회의 의안 작성에 참여했다. 성직자들의 자발적인 참여 열성 또한 대단했다. 어떤 류의 사목회의든 즉 시노드든 자발성에 의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 후속 조치가 미흡해 계속 이런 흐름이 활발히 맥을 이어가지 못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회는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으로 인간들이 살아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기 때문에 교회의 구성원들이 영성으로 충만해야 하는 것이므로 내성(內省)에 속하는 모든 의안들에서는 풍성한 영성을 기저에 깔고 신앙적 열성과 해당 분야의 지식과 활동을 진작시키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특히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의 영성 생활의 심화와 신자들의 영성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사목회의 후 한국교회 내에는 영성에 대한 활기가 충만했다.
사목회의와 민주화
또한 나는 그 당시가 군사 독재의 연장선상과 민주화 물결의 충돌 와중이었으므로 사회정의, 인권, 민주화 문제 등에 있어서 정치적으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교회의 입장 표명을 의안 담당자들에게 부탁했다.
정치사회 문제는 시간 속에서, 국민들의 경험과 의식 변화, 그리고 세대 교체 속에서 스스로 변화하는 속성을 지니는 것이니 교회가, 더 나아가서는 본당을 맡은 사목자들이 정치적으로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사목자 특히 본당 사목을 담당하는 신부들이 한편으로 쏠려 공적으로 일방적인 언행(言行)을 하면 그와 반대편에 있는 신자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때로는 냉담에까지 이르게 할 수도 있다. 교회는 세상의 정치 질서나 경제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 본 목적이 아니고 인간의 영원한 구원이 목적인데, 이런 구원이 세상 질서 안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사목자는 그런 질서가 바로 이뤄지도록 노력하되 그 주역은 신자 자신들임을 염두에 두어야 함을 명시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근본적인 사제단의 일치 문제다. 어떤 경우에도 세속적인 문제로 사제단의 일치에 금이 가면 안된다. 한국교회도 지난 70년대, 80년대, 90년대를 거쳐오면서 사제단의 일치에 문제가 없었는지 하는 문제는 지금 돌이켜보면 아픈 경험도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면서 교회가 성장하는 것 같다. 세상사는 시간의 흐름 속에 경험을 통해 또 세계적 흐름 속에서 사람들의 의식 변화 속에서 변해가게 마련이라는 것을 요즈음 새삼 실감케 된다. 사제단의 일치에 흠이 가면 되돌려 놓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 5월 6일 사목회의 개막 강론을 하고 있다.
선교열
사목회의는 신자 모두에게 신자의 의무로서 선교열을 고취시키기를 노력했다. 1980년 132만 신자가 90년에는 275만이라는 배 이상의 증가세를 보였다. 그러나 90년 이후는 계속 증가율이 둔화, 하락세를 보였다. 사목회의에서 일었던 붐과 열기, 기대가 후속조치 미비로 시들어가고 1989년의 제44차 세계 성체대회 이후 교회 내에는 사목회의 의안을 사장시킨다는 불평 분위기가 성직자, 평신도들 사이에 팽배했던 것이다.
사목회의는 가난과 가지가지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쏟아야 할 교회의 본질인 사랑과 봉사의 정신을 고취시켜 실천을 독력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이 시기에 크고 작은 수많은 애덕단체, 봉사단체들이 생겨났다.
사목과 젊은이들의 문제
나는 사목회의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급변하는 시대상을 읽어 사목적으로 대처케하는데 그 핵심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목회의는 해당 의안 부분에서 교육 문제 전반을 진지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그 당시 무엇보다도 시급하게 요구되던 가톨릭 고등교육 특히 대학교육에 있어서는 서울의 가톨릭대학, 서강대학, 대구의 효성대학정도였으며,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사목회의 자체가 전국 규모의 고등교육을 요청할 만큼 교구들이 합심하여 대학을 설립 운영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기 때문에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선뜻 안을 제시할 수 있는 형편도 못되었다.
그런 중요한 문제가 공식적 움직임으로 싹텄고 평신도 측에서 강력한 운동으로 전개됐다. 그것은 바로 서울의 가톨릭대학의 종합대학 추진 움직임이었다. 사목회의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가톨릭 종합대학인 것임을 깊이 인식한 신자 유지분들이 가톨릭의 교세 신장에 걸맞는 교육계의 책임을 가톨릭교회가 다하기 위해 알차고 내실 있는 종합대학을 추진했다.
마침 방한하시는 교황님의 한국 대통령과의 공동성명은 당시 광주 사태 등으로 말이 아니었던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일 것이고, 교황님이 어떤 국가를 방문하실 때는 방문을 기리는 기념물을 세우는 관례도 있으니 그런 기념물로 가톨릭대학의 종합대학화는 가능할 뿐만 아니라 환영할 일이라는 결론이었다. 그런 취지를 고위층에 타진한 바 좋은 반응도 얻어내는 등 사전 물밑 접촉이 거의 다 된 셈이었다.
하지만 로마에서 돌아온 교구장님을 모시고 그 동안 경위와 전망 등을 브리핑하는 회의가 열렸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서울에서의 가톨릭 종합대학의 희망은 무산되었다. 그때 성사시켰으면 지금 20년이나 지났으니 그동안 적지 않은 성과를 올렸을 것이며 사목회의가 계기가 되어 이 땅에 남을 또 하나의 큰 결실, 가장 큰 결실이었을 것이다.
「사목지침서」 발간
한편 주교단은 사목회의 후속조치로서 「한국천주교회사목지침서」를 발간하는 등 중요한 일을 진행했는데 그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책임을 맡고 훌륭한 지침서를 만든 정진석 대주교님은 사목회의 의안집이 없었다면 지침서 작성은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되풀이 말씀하셨기에 나름대로 큰 보람을 느꼈다.
소식통에 의하면 「한국천주교사목지침서」는 세계교회에서 지역교회가 이룬 최초의 지침서이기 때문에 바티칸에서는 전문가들이 3년에 걸쳐 면밀히 검토, 아주 잘 됐다는 평가와 더불어 앞으로 각 지역교회들의 지침서 작성에 훌륭한 본보기가 될 것이라는 칭찬까지 바티칸 당국으로부터 전해왔다는 후문이었다.
따라서 사목회의는 한국교회 생명의 골격 구실을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거기 더해 정진석 대주교님께서는 의안의 정신을 몸소 실천, 지금은 지역구 신부들 회합마다 참석하는 배려와 열성을 보인다니 사목회의 의안 제안의 중요한 부분을 실천, 충족시키는 것이다.
사목회의 20주년인 금년에는 한국교회법전 편찬이 정대주교님 지휘 아래 이뤄질 것이라니 사목회의를 위해 헌신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감회 또한 남다르다. 한국교회법전이 완성되면 한국교회 삶 전체는 교회공법보다는 직접적으로 그 법전에 의거하게 될 것이고 그 기초자료가 대부분 한국천주교회사목지침서에 근거하고 그 지침서는 사목회의 의안에서 자료를 취해 한 것이니 사목회의는 한국교회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