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와 가톨릭교회의 상호관계를 신학과 사회과학분야의 7개 주제로 나눠 조망하는 학술 심포지엄이 「근?현대 한국 가톨릭연구단」(연구책임=박일영 교수) 주최로 3월 27일 가톨릭대 성심교정에서 열렸다. 「사회과학분야」에서 나정원 교수(강원대), 김녕 교수(서강대), 김재득 교수(가톨릭대)의 주제발표와 약정토론이 있었다.
■ 한일합방 이후 한국 가톨릭 지도자들의 국가관 연구 / 나정원
“일제 박해 두려워 독립 배격”
-노기남 주교 이전, 재임시기와 사회교리 : 1910년부터 1968년까지
1784년 이후부터 1910년까지 한국 가톨릭 지도자들이 가톨릭을 전파하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국가의 통치이념인 유교였다. 유교의 정치이념과 생활양식을 부정하고 포교를 위해 외세의존을 시도하면서 조선이라는 국가에 대항한 교회는 고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지도자들은 현세보다 내세의 국가를 중시했고 국가지도자들은 내세보다 현세의 국가를 더 중요하게 여겨, 교회지도자들과 국가지도자들 간의 국가관에 대한 갈등은 필연적이었다. 이러한 가톨릭 지도자들과 국가지도자 사이의 국가관 갈등양상 때문에 한일합방 이후에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민족적 위기에 봉착했을 때에 아무런 해결책을 내놓을 수 없었다.
일제치하 때 교회지도자들은 국가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념이나 민족에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어 교회의 국가관을 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문을 들게 한다. 그 예로, 교회가 자본주의를 접할 때에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빈부격차에 대해서는 반대하지만 자본주의의 기본원칙인 사유재산제도에 관해서는 찬성한다. 또한 일제 치하 당시 많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사회주의의 소유권, 자본, 노동 등 사회의 객관적 성격만을 강조하는 무신론적인 태도를 거부한다.
한일 합방 이후 교회지도자들의 국가관을 형성하는 요소는 교황청의 입장과 당시 조선 땅의 합법적인 국가인 일본(조선총독부)의 정책기조 등이었다. 당시 한국교회는 성직자 중심주의, 직접적인 선교, 정교분리의 원칙을 선교방침으로 국가관을 결정했는데, 이것은 교회지도자들이 적극적으로 국가관을 형성하고 있지 못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일본의 조선총독부를 인정한다는 입장은 조선의 모든 선교사들의 생각이었다. 또한 신자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고 실천시키도록 노력했다. 교회의 안녕과 보호, 새로운 박해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인해 교회는 독립이라는 가치를 배격했고, 심지어 독립운동을 하는 신자들을 일제당국에 고발하거나 추방시켰다. 이는 교회가 식민주의의 악폐는 인정하더라도 식민지 개척자들의 공적도 인정해야 한다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으로 표현되는 좌익의 이념은 민족주의와 결부되어 현실의 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교회의 입장에서 좌익 이념은 허용될 수 없던 사상이었다. 결국 「국가의 국가관이 전체주의, 파시즘일 때만 저항하겠다」라는 모호한 기준을 세워놓고, 자의적인 해석에 따라 「종교의 참여 진퇴여부」를 가렸던 교회는 박해를 두려워하는 약자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교회는 과연 어떻게 쇄신되고 민족과 화해할 수 있을까. 공산주의와 민족주의가 구체적인 상황에서 복합적으로 나타날 경우 교회는 민족주의에 우선 가치를 두기는 힘들 것이다. 교회가 공존할 수 있는 완화된 공산주의만이 교회와 화해와 일치를 이룰 수 있고, 이럴 때 비로소 민족은 이념을 넘어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독재,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와 한국 가톨릭교회 / 김녕
“국가-교회 이데올로기적 유착”
-정치균열 및 이데올로기 지형과 교회.국가.사회 관계의 개괄과 성찰
교회는 사회·정치적 현실과 동떨어져 진공 속에 존재하지 않으며, 한국 가톨릭교회는 민족과 함께 역사 안에서 사회적, 역사적 주체로서 격변의 현대 정치사를 함께 해 왔다.
국가와 사회와의 관계에서 교회는 집권세력과 협조 내지 유착관계를 모색했고, 때로는 민주화와 인간화를 외치는 사회세력과 연대하며 집권세력과 심각한 갈등을 초래하는 등 긍정적, 부정적인 평가를 동시에 받아 왔다.
그러나, 한국 현대 정치사 속에서 교회는 어쩌면 자랑할 만한 과거사보다 다시금 성찰해야 할 과거사가 더 많을지 모른다. 교회가 국가와 사회 사이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늘 온전하기가 쉽지 않다. 반면, 교회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은 결코 적지 않았다.
역사를 살펴보면, 시민사회와 국가간에 갈등이 커질수록 정치변동은 쉽게 일어남을 알 수 있다. 예컨대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시민사회는 일방적인 지배를 행하는 국가에 분노했고, 이로 인해 권위주의 정권을 해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권위주의, 성장위주의 산업화, 정부주도 통일론의 붕괴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이 진행되는 사이 국가와 교회는 이데올로기적 유착을 진행했다. 즉,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교회 내에서 재생산되고 있는 지배의 유지?강화 및 공고화를 추구하고, 사회를 이데올로기로 통합하려 했다는 말이다. 교회의 대중을 지배하는 반공주의, 북한에 대한 턱없는 증오와 편견, 미국과 미국문화에 대한 숭배 등이 국가의 발전주의, 국가안보로서의 반공 이데올로기, 반공논리가 깔린 통일 이데올로기 등과 교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부터 유지되어온 「정교분리」의 사상 또한 국가와 교회와의 이데올로기적 유착을 가능케 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특히 한국 가톨릭교회의 경우, 고위 성직자들 및 연장 사제들 사이에서 주로 발견되는 보수주의적 태도는 성속이원론적 신학 내지 신앙관에 입각해서 교회와 정치를 분리시켜 볼 것을 강조하기에 자연히 교회의 정치적 개입을 반대하는 경향을 지니게 마련이었고, 이것 역시도 분명히 「이데올로기적 입장」, 더 나아가 「정치 이데올로기적 입장」이었다.
이데올로기와 교회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끊임없이 교회가 내세우는 교리와 맞물리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는 모든 이데올로기와 관련돼 있으며, 이데올로기가 문화적 산물로서 사회에 불가피한 것이라면 교회가 그것을 바로 이끌어줄 필요가 있다.
교회는 언제이건 간에 하나의 사회적, 정치적 압력단체가 될 뜻은 추호도 없고, 오히려 「땅의 소금,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 자신이 소모되어야 함을 의식할 뿐이며, 국가와 사회 관계를 올바른 정치적?사회적 질서, 즉 「하느님 나라」에 다가서는 질서로 이끄는, 그러면서 스스로는 불 타 없어지는 「촉매」일 뿐이다.
■ 미군정기~장면정부, 종교정책변동에 관한 연구 / 김재득
“친미 혹은 반공 종교만 지원”
-종교단체에 대한 정부개입을 중심으로
해방 이후, 종교를 둘러싼 한국사회의 환경은 남북분단, 미군정기, 한국전쟁, 군사쿠데타 등 급속한 변화를 겪게 됐다. 이와 더불어 종교에 대한 정부 정책 또한, 정부와 종교간의 관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됐다.
미군정기의 한국 사회는 정치.종교적으로 신질서를 갖추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정치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롭게 전개되는 세계질서에 본격적으로 편입되는 한편 근대적인 국민국가의 형성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종교적으로는 종교의 자유와 종교활동의 보장에 따라 각 종교들이 종교시장에서 우위를 회복하기 위해 조직을 강화하면서 경쟁적 활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미군정기 종교정책의 기조 역시 종교의 자유를 전폭적으로 보장한다는 내용이었지만, 이것은 종교의 자유에 대해 편파적이었다. 친미.반공이데올로기의 관철과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도움이 되는 종교들은 지원하고, 이에 반대되거나 저해 된다고 판단되면 억제하는 것이 미군정의 기본적인 종교정책 기조였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 초기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해방 이후 피폐한 국내 경제의 복원과 국토방위를 위한 군의 정비였다. 권력기반이 취약했던 그는 친미.반공이데올로기와 경찰, 관료에 의한 권위주의적 통치 구조를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했고, 이런 이승만 정부의 지배이데올로기는 종교정책에도 그대로 투영됐다. 친미.반공이데올로기를 채택했던 개신교와 가톨릭에 대해서는 친화관계를 맺으면서, 유교와 불교 등과 같이 이승만 정권의 지배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적었던 종교에 대해서는 내부붕괴를 유도하며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장면 정부는 1960년 8월부터 약 9개월 동안 운영됐지만, 5.16 군사 쿠데타에 의해 실각함으로써 장면 총리에 대한 평가는 다소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에 대한 평가는 종교정책보다 그가 총리가 된 이후의 상황에 대한 평가가 더 의미 있을 수 있다.
개신교 신도인 윤보선 대통령과 가톨릭 신자인 장면(요한) 총리가 꾸리는 국정은 어찌 보면 「개신교.천주교 연합 정치 체제」와 비슷하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장면 정부시절, 교회는 민주주의, 정의, 애국심, 양심을 외쳤지만, 과거 개신교의 횡포에 시달렸던 가톨릭교의 신자가 국가수반이 되어 이것이 신.구교 간의 권력다툼으로 변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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