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순교정신 세계에 과시
자부심과 긍지, 사회적 지명도
폭발적인 신자증가율로 이어져
# 회상 1
1984년 5월 6일 일요일, 서울 여의도광장은 여느 때와는 다른 아침을 맞고 있었다. 여의도의 정적을 깨뜨린 것은 새벽운동에 나선 이들도 야근을 마친 회사원들의 발걸음도 아니었다. 새벽 4시로 예정된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신앙대회 및 103위 시성식」 행사장 입장을 위해 밤 2시부터 광장을 찾은 신자들의 행렬이었다. 손과 손에 묵주와 성서를 든 채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신자들의 행렬은 흡사 민족대이동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했다. 광장으로 통하는 서울대교(현 마포대교)를 비롯한 원효대교 등 4개의 다리는 지방에서 올라온 차량들로 넘쳐나 7시경에는 노량진수산시장까지 1.5km의 행렬을 만들어냈다. 7시30분, 서울대교가 봉쇄되려하자 500여명의 신자들은 단거리선수처럼 전력으로 질주해 역사의 현장에 도착했다. 이렇게 7시50분까지 광장을 메운 신자들의 수는 100만명. 한국 신자의 반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오전 9시, 「비바 파파」를 연호하는 속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제단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교황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신자들의 마음도 그의 발걸음을 따라가는 듯했다. 점차 따가워지는 햇볕 속에서도 신자들은 4시간 가까이 진행된 행사 동안 조금의 미동도 없이 이 땅에서 103위 성인이 탄생하는 역사적 현장을 마음에 담아내느라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는 표정들이었다.
『오늘날 한국에서 교회가 이처럼 훌륭히 꽃피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증거의 열매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교회의 오늘을 순교자들에 의한 것임을 거듭 천명하며 한국교회의 밑바탕이 된 빛나는 믿음의 삶에 경탄을 표하자 뭉클하는 마음에 눈가를 찍어내는 신자들도 적지 않았다.
# 회상 2
『엄마, 저 사람 누구야?』 『응, 저 분이 교황님이시란다』 『교황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대신하시는 분이야…』 『그런데 우리나라엔 왜 오셨어』 『…』 『그러면…』
전날 엄마 아빠를 따라나서려다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계되는 방송화면 속에서 부모를 찾으려 꼬박 텔레비전 앞에 붙어 앉아있었던 김로사(로사, 당시 7살)양. 엄마 차억순(엘리사벳, 당시 38살)씨와 얘기를 나누며 알듯 말듯 고개를 끄덕이던 코흘리개 꼬마는 이제 어엿한 스물일곱 숙녀로 성장해 수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
당시 200주년기념행사위원회 홍보분과위원으로 행사기록을 담당했던 김영걸(안드레아, 66) 감독은 『그 때의 감동을 떠올릴 때면 지금도 가슴이 벅차오는 것을 느낀다』며 『신자들 가운데 그 감동과 느낌을 이어오지 못하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꼭 20년 전 한국교회는 보편교회 속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나는 계기를 맞았다.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대회」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성인 시성식은 아시아의 한 변방에 위치한, 숱한 순교의 피를 자양분으로 200년 역사의 텃밭을 일군 조선교회, 그리고 현대사의 고난과 역경을 분단이라는 현실 속에서 상징적으로 품고 있는 한국교회의 최대 경사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를 통해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이뤄지던 시성식 관례를 깨고 교회 역사상 최초로 한국교회에서 시성식을 거행함으로써 전 세계 교회의 눈을 아시아로 돌려놓았다. 103위 성인의 시성은 단순히 교회사에 또 하나의 역사적인 사실을 추가하는데 그치지 않고 성인들을 통해 세상을 순례하는 교회에 하느님의 영광을 새롭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교회가 세계 교회를 향하여 새롭게 성숙된 모습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것도 그동안 한국교회를 뒷받침해온 순교정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한국교회는 103위 성인을 모심으로써 새로운 전환의 계기를 마련하는 내적 성숙의 기틀을 다져 나갈 수 있게 됐다. 이를 통해 다져진 자부심과 긍지, 대사회적 지명도가 폭발적인 신자 증가율로 이어진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휴전 이후 50년대의 폭발적인 교세 증가에 비견되는 높은 신자 증가율에 힘입어 한국교회 신자는 1992년 300만명을 돌파하는 역사를 맞기도 했다.
시성식을 통해 한국교회 신자들은 믿음의 바다를 향해 더욱 힘차게 나아갈 수 있는 신앙의 오아시스를 새롭게 발견한 셈이었다. 그러나 현재를 돌아보면 단 한분의 성인도 모시지 못했던 수백 년에 걸친 갈증을 해소한 후 오아시스에 대한 기억을 점차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들게 하는 게 우리의 모습이다. 이는 103위 성인이라는 신앙의 푯대는 여전하지만 그를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이 갈수록 줄어드는 모습에서도 살필 수 있다.
따라서 103위 시성 20주년을 맞는 오늘, 더 큰 꿈을 꿀 수 있는 기억의 회복이 필요하다.
▲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신앙대회 및 103위 시성식.
■ 103위 성인 탄생까지
▲ 1846년 : 조선 제3대 교구장이던 페레올 주교가 현석문(가롤로)과 이재의(토마스)가 수집 정리한 기해박해(1839년) 순교자 73명의 행적과 자신이 직접 수집한 병오박해(1846년) 순교자 9명의 행적을 프랑스어로 번역, 이듬해 홍콩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로 보냄.
▲ 1847년 : 최양업 부제가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해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냄.
▲ 1847년 10월 15일 : 파리외방전교회 루케 주교가 교황청 예부성성(현 시성성)에 제출함.
▲ 1857년 9월 24일 : 교황 비오 9세가 82명의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조사 심리를 위한 법령을 반포함. 이로써 김대건 신부, 정하상 등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이 가경자로 선포됨.
▲ 1884년 : 뮈텔 신부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에 대한 본격적인 자료 및 예비 조사사업이 시작됨.
▲ 1901년 : 병인박해 순교자 29위의 「병인 순교자 시복 조사 수속록」이 예부성성에 제출됨.
▲ 1918년 11월 13일 : 교황 베네딕도 15세가 병인박해 순교자에 대한 시복 건의 개시를 허락함.
▲ 1925년 7월 5일 :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82명 중 79명이 시복됨.
▲ 1968년 10월 6일 :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뮈텔 주교가 접수시킨 병인 순교복자 중 24명이 로마에서 시복됨.
▲ 1984년 5월 6일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에서 순교복자 103명이 시성됨.
◆ 인터뷰 / 영남교회사연구소 마백락 부소장
“순교 정신 본받을 때 신앙의 새 불씨 활활”
『교황님께서 103위 순교자의 시성을 선포할 때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눈물지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1984년 5월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거행됐던 「103위 시성식」을 떠올리며 다시금 눈시울이 붉어진 영남교회사연구소 마백락(클레멘스?66?대구대교구 신동본당) 부소장은 은총이라는 말로 당시를 회고했다.
행사 당일 시성식에 참가하기 위해 교우들과 새벽 2시에 일어나 서울로 나섰다는 마부소장은 시성식이 성숙한 신앙인의 참모습을 모든 국민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내적으로는 신자로서의 자긍심을 갖고 외적으로는 폭발적인 신자 증가의 촉매가 됐다고 평가했다.
『한국교회가 한 단계 더 성숙한 성년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103위 성인이 탄생할 수 있었고, 정식으로 성인의 풍모로 변모할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교황님의 한국 방문과 시성식이었습니다』
시성식을 전후해 한티 순교자성지 순교자 묘소 발굴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던 마부소장은 한국교회 200주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교회 안팎의 열띤 분위기를 전하며 순교신심이 한국교회의 바탕임을 강조했다.
『1966년 병인박해 100주년을 전기로 교회가 순교영성 앙양에 본격 나섰고 각 교구마다 순교자의 시성을 위해 순교자 선정, 성지개발 등에 힘을 기울여왔는데, 한국교회 200주년이 한 고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교황의 강론 중 중국교회 선교를 한국교회에 당부한 부분을 가슴에 새겨왔다는 그는 쉬 열릴 것 같지 않았던 중국사회가 열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의 큰 섭리를 느낀다며 받는교회에서 주는교회로 성장한 한국교회의 모습에 감격스러워했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크게 성장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103위 성인을 잉태한 신앙의 터전 때문이라고 밝힌 그는 그러나 기쁨으로 충만했던 그 때의 감격을 잊고 있는 지금과 냉담자가 늘고 있는 현실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고 역설했다.
『한국교회의 정신은 바로 순교신앙입니다. 단순히 말로써 교회를 알리기보다 이웃사랑의 표양으로 순교자들의 정신을 살아갈 때 식어가는 신앙의 새로운 불씨를 살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