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다운 삶에 대한 본질적 의문 제시
원로시인 구상(세례자 요한.84) 선생의 고명딸인 구자명씨의 첫 소설집. 1997년 마흔이라는 늦깎이 나이로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한 구씨가 그 동안 여러 문예지에 발표했던 작품들을 모은 것으로, 표제작이기도 한 연작소설 「건달」이 대표작이다. 책은 건달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 「뿔」과 「지도는 길을 모른다」, 「숲 속의 빈터」 등 모두 7편의 중.단편을 담고 있다.
구씨의 소설에서 「건달」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불량배를 뜻하지 않는다. 주인공의 표현을 빌리자면 「힘들게 노력해야 하는 어떤 일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쉽게 말해, 뭔가를 기를 쓰고 성취하고자 하는 욕심이 없기에 힘들여 일하지도 않고, 속도와 능률에 등을 돌린 채 무위도식하며 지내는 유유자적한 인물이다.
이외에도 구씨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더 빨리」를 외치는 이 사회의 속도에 편승하거나 치열한 생존경쟁에 끼어 달려가지 않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상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몸짓과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다운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의문이 생긴다. 또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번 곱씹어 보게 만든다.
한편 소설집 표지의 추상화는 서양화가인 남편 김의규(가브리엘.47.성공회대 디지털콘텐츠학부 교수)씨의 작품이다.
■ 인터뷰 / 소설가 구자명 씨
“부끄럽지 않은 가톨릭 작가 될터”
▲ 구자명 작가는 『신앙인으로서 특히 다른상이 아닌 가톨릭문학상을 받게 돼 더욱 기쁘다』고 말한다.
『「건달」은 1997년 등단 이후 6년만에 발표한 첫 소설집이에요. 아직 햇병아리 작가에 불과한 제가 이렇게 큰상을 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특히 다른 상이 아닌 가톨릭문학상을 받게 돼 더욱 기쁩니다. 앞으로도 문학을 사랑하고 작품 활동에 매진하라는 뜻이겠지요』
구자명씨는 문단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소설가다. 그도 그럴 것이 등단 후 번역 작업에만 매달려왔기 때문이다. 「구상 시인의 딸」이라는 수식어의 무게도 만만치 않았다. 유명 문인 2세라는 꼬리표는 그를 더욱 위축시켰다.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했던 펜과 종이 앞에 주저 앉기를 몇 차례. 결국 마음을 돌려세워 그간 발표한 작품을 모아 책을 냈다. 어찌했건 이번 수상작 「건달」은 그에게 있어 인고의 세월 끝에 태어난 「옥동자」다.
『병상의 아버지께 보여드리기 위해 출간을 서둘렀던 첫 작품집이에요. 목에 호스를 꽂고 있던 아버지는 당시 이 책을 받고 나서 손가락으로 베개에 「나 죽기 전에 네 책을 만나게 돼서 반갑다」고 한자 한자 쓰셨어요』
구씨는 『소설 속 실험을 통해 이런저런 삶을 살아보는 과정에서 인생의 어떤 비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소설을 쓴다고 했다. 그는 또 『「각각의 언어에도 영혼이 있기 때문에, 작가는 자신이 구사하는 언어의 진실을 살지 않는다면 그 말은 무의미한 말장난」이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작품활동의 구심점이 된다』고 강조했다.
80평생 문학 외길을 걸어온 노(老)시인의 눈에는 어쩌면 지난 세월 딸자식의 삶이 「건달」 처럼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2대에 걸친 문학 사랑을 아름다운 결실로 끝맺는 건 자명씨의 몫인 것처럼 보인다. 가톨릭문학상 수상은 그 힘찬 첫 걸음이다.
『글쓰기와 창작의 재능을 허락해주신 하느님께, 그리고 문학에의 열정을 물려주신 아버지께 오늘의 영광을 올립니다. 앞으로도 부끄럽지 않은 「가톨릭 작가」가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 작가 약력
1957년 경북 왜관 출생
1980년 미국 하와이주립대 심리학과 졸업
1997년 계간 문예지 「작가세계」에 단편 소설 「뿔」로 등단
▶ 작품
<단편소설> 뿔
<소설집> 건달
<번역> 조개줍는 아이들, 재즈의 연인, 예수는 사랑만 하셨다, 미팅 지져스, 피터 팬, 그림책으로 만나는 어린이 셰익스피어 선집 시리즈(한 여름밤의 꿈, 로미오와 줄리엣, 맥베스 등), 내 영혼의 빛
■ 심사평 / 소설가 김용성 교수(인하대 국어국문학과)
“인간구원 의식과 예술적 성취도 뚜렷”
제7회 가톨릭문학상 수상 대상 분야는 심사위원회를 거쳐 소설 쪽으로 정했다. 심사 장르가 해마다 바뀌는 사정을 감안했고, 심사 대상 작품집의 발간 연도 범위에는 신축성을 부여해 몇 해 소급하면서까지 4개의 소설집을 심사했다.
심사위원회는 그 결과로서 아직 신인급의 작가인 구자명씨의 창작집 「건달」에 수상하기로 결정했다. 인간구원의 주제의식과 작품세계의 예술적 성취도가 심사의 기준이기 때문이었다.
소설집 「건달」은 언뜻 보기에 도덕적 일탈자를 느끼게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 소설 「뿔」속 건달의 성격은 「나다운 삶」의 독자적 모습으로서, 생산제일주의의 경쟁적 생존방식으로 사회 안에 파괴와 해악을 끼치는 경우의 반대가 되는 인간형이다.
주인공은 평화주의자이며 보존주의적 차원에서 세상에 기여한다는 생각의 사람이다. 독자들도 평화로운 마음으로 재미를 느끼며 읽게 되는 작품이다.
작품집 속 「지도는 길을 모른다」는 인간 삶의 길이 「지금 여기 존재하는 상태에서 만들어 가는 무엇」이란 깨달음을 제기한다. 기존의 진리 틀에 비해 생동하는 것 같은데, 동시에 봉쇄수도원을 지망하는 다른 주인공을 덧붙여 「발산」만이 아닌 「보존」을, 원심력과 구심력의 균형을 또한 만들어 놓았다.
「숲 속의 빈터」에 나오는 세 명의 젊은 주인공은 어버이 세대에 애증을 느낀다. 그러나 「미움도 애착이 없으면 생기지 않는다」. 아버지 또는 남편을 떠난 「새 집 짓기」를 구상도 하지만 인간 살이 자체가 유한하다는 것과, 집 지을 「새 자료」라는 것이 우주의 역사 안에는 없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끝없는 사랑에 대한 긍정이라고 볼 수 있다.
「세계의 가을」은 현대 물질문명의 문제를 감당해 본다. 통신망 때문에 거죽만 지구촌이 되고 내면적으로는 인간들의 삶이 점점 흩어지는 불행의 문제를 본다. 해체주의 철학의 한계에 대한 지적이다. 그럴수록 자포자기로 휩쓸리지 말고 평화롭고 자연스러운 삶에 대한 비전을 심어야 인간들에게 희망이 있게 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