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1일 정오. 서해를 바라보며 자리한 순교 성지 갈매못에서는 1866년 병인박해때 이곳에서 치명한 다블뤼 안 주교의 출신 교구, 프랑스 아미앙 교구(교구장=브이이으헤 쟝 룩 주교) 신자들과 이들의 한국 방문을 주선한 서울 갈현동본당(주임=용동진 신부) 신자들이 한데 모여 미사를 봉헌하는 뜻깊은 자리가 있었다. 140여년 세월을 뛰어넘은 한국과 프랑스교회 순교자 후손들의 감격적인 만남이었다.
마침 이들의 갈매못 방문을 기해 다블뤼 안주교 동상 제막식이 열리기도 했던 이날, 순례에 동행한 아미앙 교구장 브이이으헤 쟝 룩 주교는 다블뤼 안 주교가 생전에 입었던 중백의를 갈매못 성지에 기증함으로써 27세 나이에 머나먼 동양의 한 나라에 복음 전파를 위해 입국했다가 사제로 주교로 21년동안 한국 신자들을 위해 선교사의 삶을 다했던 다블뤼 안 주교의 순교 정신을 양국 교회가 더욱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한국 신자들과의 대면을 이룬 아미앙 교구 신자들은 교구장 주교를 비롯 브아싸흐 쟝 마흐 신부 드 라 시몬느 길 신부 등 사제 2명과 22명 신자들로 구성돼 4월 19일부터 29일까지 9박 10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다.
97년 파리 세계청소년대회때 아미앙 교구를 방문한 한국 청년들과의 인연을 통해 한국 방문을 추진했던 이들은 2년여 동안의 준비를 거쳐 교구 성인이 순교의 피를 뿌린 한국 땅을 밟았던 것.
「종교」와 「문화」라는 틀안에서 한국 교회와 한국을 경험하고자 했던 이들은 갈현동 본당이 본당 설립 10주년 행사 일환으로 순례 일정을 주관하게 됨으로써 한국인들의 신앙과 삶의 모습을 보다 친밀하게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기회를 가졌다.
신리공소, 갈매못성지 등 다블뤼 안주교와 관련한 성지를 순례한데 이어 경주 불국사 양산 통도사 등 불교 사찰들과 양동 민속마을 용인 민속촌을 찾았던 순례단은 구역반모임 참관 서울가톨릭대 신학대학과 명동성당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 방문 등으로 교회와 문화 곳곳을 살피는 프로그램을 가졌으며 삼성전자 현대중공업 견학으로 한국 경제 원동력의 현장도 방문했다.
▲ 다블뤼 안 주교 동상 축복 프랑스 아미앙교구 순례단과 서울 갈현동본당 신자들은 4월 21일 낮 12시 갈매못 성지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사진은 대전교구장 경갑룡 주교와 아미앙교구장 브이이으헤 쟝 룩 주교 주례로 거행된 다블뤼 안 주교 동상 축복식 장면.
갈매못 성지·신리공소 찾아
갈매못 성지 순례와 함께 이번 행사의 또다른 중요 축을 이뤘던 4월 25일 오전 11시 갈현동본당 10주년 기념미사는 프랑스 신자들이 갈현동 본당 공동체와 공식 상견례를 가지면서 한국 신자들과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함께 영성체를 하며 순교자들이 이어준 같은 신앙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의미를 주었다.
순례단 책임을 맡은 가페 베르나르도씨는 『미처 알지 못했던 한국 문화와 전통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알게된 기회였고 한국 신자들의 친절과 환대, 열성적인 본당 활동과 역량이 감동적』이라고 말했다.
최근들어 다소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프랑스 교회가 오랫동안 성직자들에게 무관심해 왔던 시각에서 볼 때 평신도들이 고유 영역 안에서 사제들의 사목활동을 지원 협력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고.
순례단은 2005년 9월 23∼24일 생페르맹 축제 기간에 한국 신자들을 초청할 계획이다. 3세기부터 시작된 아미앙 교구의 역사와 오늘날의 교회 모습을 한국 교회 신자들과 나누고 싶다는 것이다.
『순교자들의 피로서 이뤄진 우정속에 한국 신자들이 프랑스 신자들의 깊이 있는 신앙을 알게 되고 또한 그들에게 한국교회가 소개됨으로써 세계 교회안의 한국 교회를 체험하게 되었으면 한다』는 갈현동 본당 측의 기대가 결실로 이어지게될 전망이다.
한편 이번 순례단에는 3세때 프랑스로 입양된 렌느 드니스(23) 군이 양어머니 렌느 마리 끌레르씨와 함께 참가해 눈길을 끌었다. 마리 끌레르씨는 드니스 군과 함께 형도 입양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데니스군이 자신의 뿌리를 찾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하기 위해 순례를 계획했다고 밝혔다.
▲ 갈매못 성지를 방문한 아미앙교구 순례단이 다블뤼 안 주교의 순교정신을 기리며 순교비 앞에서 성가를 부르며 기도하고 있다.
■ 아미앙교구장 브이이으헤 쟝 룩 주교
“생동넘치는 한국교회 인상적”
▲ 브이이으헤 쟝 룩 주교
25명 교구민들과 함께 한국 교회를 찾은 아미앙교구장 브이이으헤 쟝 룩(Bouilleret Jean Luc) 주교는 『가톨릭 신앙인 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 한국 신자들 모습은 프랑스 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많은 것 같다』면서 『앞으로 정기적 교류 방안을 마련해서 한국 교회는 프랑스 교회에 신앙적 활력을, 프랑스 교회는 평신도 교육이 활성화되어있는 장점을 활용 한국 교회에 신자 교육 프로그램 등을 협력할 수 있도록 관계를 만들어 가고 싶다』고 전했다.
『한국이 대단히 영성적인 나라인 것 같다』고 소감을 밝힌 그는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룩한 나라」로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지만 신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또 사찰이나 한옥 마을 등 불교 유교 전통이 남아 있는 곳들을 찾아보면서 섬세한 전통 문화와 함께 그안에서 어우러진 영성적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고유 문화의 지혜와 만남을 이뤄 뿌리내린 한국 가톨릭 교회의 독특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리고 평신도들에게서 느껴지는 생동감과 함께 젊은이 사목을 중시하고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는 면은 매우 인상깊었습니다』
오는 5월 11일로 주교 서품 1주년을 맞는 브이이헤 주교는 프랑스 주교단내에서 젊은 쇄신파로 주목 받고 있는 인물. 교구민들과 함께 아시아 교회를 방문한 이번 한국 순례에 대해 프랑스 교회내에서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후문이다.
『안주교가 치명한 한국땅에서 프랑스 한국 교회 신자들이 함께 성체를 모시고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드리며 특히 문화와 인종의 다양성을 뛰어넘어 신앙이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들어 준다는 것을 새롭게 깊게 체험했다』는 그는 『무엇보다 갈매못 성지에 다블뤼 안주교가 입으셨던 중백의를 봉헌한 것이 큰 기쁨이었다』고 전했다.
브이이으헤 주교가 맡고 있는 아미앙 교구는 3세기경 스페인 선교사 성 페르맹에 의해 설립된 유서깊은 교회로서 현재는 49개 본당에서 120명의 사제가 활동중이다.
1981년 사제서품후 지난해 주교로 서품된 브이이으헤 주교는 프랑스 국내 및 이태리 미국에서 윤리신학과 사회학을 전공했으며 리용가톨릭대학교에서 기초윤리, 정치윤리 등을 강의한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