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인 탄생의 의미
1984년 5월 한국땅에서 이뤄진 시성식으로 200년 역사에 단 한명의 성인도 모시지 못했던 초라한 한국교회는 전세계 가톨릭교회 사상 최초로 한꺼번에 103위 성인을 모시는 풍성한 교회로 거듭나게 됐다. 한국교회와 신자들의 순교 신심에 결정적인 토대가 놓이게 된 것이다.
103위 성인 탄생으로 한국교회는 우리의 문화와 전통을 간직한, 그래서 더욱 우리의 삶에 잘 녹아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의 표상을 갖게 됨으로써 신앙의 토착화를 위한 의미있는 나침반을 보유하게 되었다.
태생부터가 순교자의 교회였던 한국교회는 시성을 통해 엄청난 피의 순교로 구원의 소식을 전했던 역사를 인정받음으로써 세계 교회에 자신의 모습을 알릴 수 있게 됐다. 아울러 보편교회 안에서 역동적인 자신의 소명과 역할을 이해하고 수행할 수 있는 새로운 출발선에 섬으로써 교회사에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게 됐다. 특히 한국교회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으로 다양하고 심오한 정신 문화의 요람인 아시아 대륙의 교회로 세계 복음화의 여정에서 중차대한 몫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를 각성한 한국교회와 신자들이 거두기 시작한 열매는 곳곳에서 가시화되었다. 시성식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신자증가율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103위 성인 탄생을 전기로 한국교회에서는 성인들에 대한 관심이 고양됨으로써 각종 현양사업과 성지순례 등을 활발히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 결과 이듬해인 1985년 5월에는 한국주교회의 전례위원회가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 98위」에 대한 시복시성운동을 인준함으로서 순교자 현양 움직임이 새로운 가닥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 경과와 평가
제2 시복시성 추진
시성식을 계기로 한국교회는 103위 성인에 포함되지 못한 초기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추진함으로써 한국교회 고유한 신심을 형성해온 순교자 신심에 새로운 눈을 돌리게 됐다.
1831년 조선교구 설정 후 선교사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한 시복시성운동은 ▲79위 순교자 시복(1925) ▲24위 시복(1968) 등을 거쳐 103위 시성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게 된 것이다.
제2시복시성 추진은 시성식 전인 1980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의 「시복시성추진위원회」로부터 시작됐으나 103위 시성식과 맞물려 중단됐었다. 시성식 직후 총 98명의 초기 교회 순교자들을 선정해 1985년 5월 20일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 98위」에 대한 시복시성 추진을 주교회의로부터 인준받아 청원서와 약전을 교황청에 제출했지만 성과를 얻지 못했다.
「200주년 시복시성추진위원회」가 해체되자 교구별 시복 추진 움직임이 가시화됐다. 전주교구는 1987년 시복청원준비위원회를 구성해 윤지충 등 5명의 순교자들을 「하느님의 종」으로 신청하고 이듬해 9월 교황청 특별법에 따라 위원회를 구성, 청원서를 작성해 교황청에 발송했으며 4월 12일 시성성으로부터 시성 청원에 이의가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청주교구는 1995년부터 최양업 신부의 시복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96년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에서 시복 추진을 인정받았다. 수원교구는 96년 1월 윤유일과 주문모 신부 등 8명의 시복 추진을 결정하고 10월에는 교황청으로부터 장애 없음의 응답을 받았다. 수원교구는 이어 강완숙 골롬바 등 순교자 9명의 시복을 한데 묶어 추진하기 시작했다.
대구대교구는 96년 10월 관내 순교자들에 대한 사료연구와 수집에 착수, 을해?정해?병인 박해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추진하기 시작해 98년 9월 교구장이 순교자 23명에 대한 시복시성 추진을 선언했다. 서울대교구는 한국교회사연구소가 1996년 31명의 순교자를 일차 선정, 시복시성 추진을 교구에 건의한 바 있고 순교자현양위원회도 꾸준한 작업을 계속해오고 있다.
이처럼 각 교구별로 이뤄져오던 시복 추진은 1997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에서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 작업을 주교회의 차원에서 통합 추진한다』고 결정함으로써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다.
주교회의는 1998년 「시복시성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한데 이어 2000년 12월 통합 추진에 관한 의견을 시성성에 문의, 공동추진을 위해서 한국 주교회의를 청구인으로 선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답변을 받음에 따라 주교회의 의장 박정일 주교를 시복시성을 공동으로 추진할 교구장 주교로 선출했다. 그 결과 지난 2002년 교황청 시성성이 한국 주교회의에서 요청한 순교자 124위의 시복시성 통합 추진건을 승인함으로써 제2의 시복시성 추진이 본격화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추진되고 있는 시복시성운동은 프랑스 선교사 주도로 이뤄졌던 103위 시성 때와는 달리 한국교회가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시복시성운동이 올바르게 이뤄질 때 한국교회는 신자들의 자발적인 순교 신심을 함양하고 정착시킬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한편에서는 103위 성인 탄생의 환희와 열정, 그리고 이로 인한 발전의 추진력이 퇴색하고 있다는 우려도 일고 있다. 이같은 현실은 다채롭고 풍부하다고 할 수 있는 순교자들의 삶과 그 삶에서 배어난 신심을 바탕으로 한 자양분을 내면화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순교성인들의 생애와 믿음을 배울 수 있는 장이 미흡하다는 데서 그 결정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한 예로 순교자들의 삶과 정신을 배울 기본 텍스트인 성인 전기와 순교자들의 전기조차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 과제
한국 성인 탄생은 한국교회의 신앙적인 자부심만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많은 신자가 103위 시성의 의미를 망각하거나 당시의 감격을 심화시켜내지 못함으로써 순교신심을 뿌리내릴 수 있는 동력을 점차 상실해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므로 제2의 시복시성 추진에 있어서 신자들 사이에 순교자 현양운동이 정착되고 순교 신심이 자리잡도록 하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따라서 시복시성 추진 작업 자체가 일부 관계자들만의 열정에 의해 이뤄지거나 단순히 교회 지도층이나 학자들에 의한 학문적 연구, 행정적 처리만으로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신자들의 순교 신심을 고양시킬 수 있도록 다양한 현양 프로그램과 교육이 병행되어야 한다. 아울러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순교자의 신심을 어떻게 삶으로 드러낼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천하도록 이끌 필요성이 있다.
또한 우리에게 신앙을 전해준 신앙 선조들의 삶과 신앙을 생활 안에 체화시킴으로써 신앙적 활력과 깊은 신심 등 한국교회가 지닌 보화를 전세계 교회와 나눠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급변하고 극도로 세속화된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참 진리를 수호하고 지켜나가야 하는 소명이 더욱 커져가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세속의 가치와는 다른 가치, 참 진리와 영원한 생명에 대해 주저하지 않고 결단하는 순교적 삶의 표양을 일궈나가야 할 것이다.
◆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 소장 인터뷰
“보다 성숙된 현양운동위해 교회의 노력과 투자 절실”
『지난 20년 동안의 현양운동이 과거의 그것에 비해 활성화되었는가 하는 부분에는 적잖은 의문이 따릅니다』
청주교구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루가, 49) 소장은 103위 시성식 이후 교회 안팎에서 펼쳐져 온 순교자 신심운동의 성과에 대해 회의를 표시한다.
이런 현실의 원인을 신앙 선조와 후손간의 대화 부족에서 찾고 있는 차소장은 순교자 영성에 대한 관심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역설한다.
『103위 성인의 전기도 시성식 이전에 발간된 것이 고작이고, 성인들에 대한 연구도 지난 20년 동안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습니다. 이런 바탕에서 순교자 신심이 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봅니다』
교회사가로서 느끼는 이런 답답함에 지난해엔 몸소 교회 창설기에 활동했던 순교자들의 고난의 삶과 순교를 그린 교회사 연작물 「고난의 밀사」를 펴내기도 했던 차소장은 순교자 현양의 바탕이라 할 신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다양한 노력을 강조한다.
차소장은 지난 20년 동안 전국의 순례지가 크게 증가하고 개인이나 단체, 본당 단위의 성지순례와 순교자 현양대회가 활성화되어 온 현실과 「하느님의 종」 124위에 대한 시복시성운동이 펼쳐지고 있는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신자들의 삶이 그에 맞갖은 순교영성으로 고양돼 있느냐 하는 문제에서는 부정적이다.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순례객의 모습이나 신자들의 열성에 만족해서는 순교자들의 순교 신심으로부터 취할 수 있는 열매 가운데 많은 부분을 따기도 전에 썩혀버리기 쉽습니다』
한국교회가 한 단계 더 성숙할 수 있는 밑거름을 순교 신심에서 발견해야 한다고 말하는 차소장은 교회의 적극적인 노력과 투자를 역설한다. 신자들에게 끊임없이 순교자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자발적으로 현양운동에 나설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려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위원으로 순교자 124위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차소장은 103위 시성 20주년을 통해 한국교회가 부여받고 있는 소명을 새롭게 돌아보길 제안한다.
『시성은 후손과 신앙 선조들과의 살아있는 대화의 결과여야 합니다. 이 대화가 복원될 때 식어가는 신앙의 불씨를 새롭게 살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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