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구제회 활동을 통해 종교를 구별 않고 인종이나 이념을 떠나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서는 까리따스의 정신이 자연스럽게 내 몸에 녹아 들어감을 느끼면서 감동에 겨워했던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렇게 교회로 한발한발 다가설 수 있었던 뒤에는 아내의 힘도 적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아내를 만나 당신의 길을 걷도록 해주신 것도 묘한 안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강대학교에 재직하던 시절 예수회 박고영 신부님이 성가단을 만들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오셔서 신촌에 있는 대학교 졸업생과 재학생들로,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는 「아퀴나스합창단」을 만들었는데 여기서 만나 백년가약을 맺은 이가 지금의 아내다.
20여명의 단원들은 매 주일 서울 명동성당 오후 5시 미사 때 음악봉사를 했는데, 박신부님이 유학을 떠나시고 공교롭게도 반주자마저 미국에 가는 바람에 어렵게 구한 반주자가 아내였던 것이다. 아내는 전통적인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 당시 서울 정동 제일감리교회 제1 반주자로 활동하던 중이었다. 정동 교회에선 반주자에게 수고료를 주는 게 관례였지만 우리 합창단은 자기들이 좋아서 하는 일이라 그런 것도 없었던 터라 합창단 책임을 맡고 있던 내가 미안한 마음에 주머니를 털어 식사나 차를 사곤 하다 가까워져 결혼에까지 이른 것이다.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일에다 벌이도 시원치 않은 남편이 원망스러웠을 법도 한데 아내는 『남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며 오히려 격려해주고 지원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창 가톨릭구제회 활동에 힘을 기울이고 있던 72년 집중호우로 남한강이 범람하는 대홍수가 일어났다. 그 때 구제회 사무실 별관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본관에서 큰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교통이 다 끊긴 줄로만 알았던 원주에서 어떻게 찾아오셨는지 지학순 주교님이 『홍수로 다 떠내려갔는데 뭣들 하고 있느냐』며 호통을 치고 계시는 게 아닌가. 나는 부랴부랴 준비를 해 현장을 파악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지주교님께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신부님들이 쓰던 지프차를 내주셔 상서국장 신부님과 영월 제천 등 피해현장을 돌아보고 보고서를 작성해 구호사업 지원이 이뤄지도록 했다. 이 때 처음으로 지학순 주교님과 인연을 맺게 됐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나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다는 소박한 생각이 앞섰을 뿐 신앙과 삶이 철저히 연결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 시기에 나는 또 한번 의미있는 체험을 하게 된다. 경상북도 상주의 나환자촌을 둘러보고 나오던 중 별 계획도 없이 근처에 있던 또 다른 나환자촌에 들렀는데 이 마을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가톨릭구제회가 계속 지원을 해주다 몇 가지 문제로 한동안 지원이 끊겼는데 그 사이 마을사람들이 똘똘 뭉쳐 자신들의 마을을 변화시키며 활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지원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분위기만이 짓누르고 있는 마을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며 가난이라는 게 무조건적인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조정신이 가난의 굴레를 스스로 벗게 하는 힘이라는 사실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 때의 경험은 이후 까리따스의 사업을 펼쳐나가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활동의 원칙이 됐다.
나는 이 때 「겸손해야 잘 볼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경험을 통해 체득하게 됐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이들도 하느님께서 지으신 것일진대 겸손히 자신을 낮출 때 사물은 물론 사람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다가옴을 현장에서 확인했던 셈이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모자란 사랑만 지니고 현장에 뛰어든 나같은 이의 눈도 하느님은 이렇게 뜨게 해주셨던 것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