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만약에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또 죽은 사람이 자꾸 다시 살아난다면?
우선 병원 영안실이 간판을 내릴 것이다. 또 공원묘지 분양사업도 문을 닫을 것이다. 장의와 장묘 직업 종사자들의 대량 실직 사태는 불을 보듯 뻔할 테고, 그 대신 실버타운 개발 등 노인복지 관련 사업은 코스닥 상장종목 가운데서도 연일 가파른 상승세를 탈 것이다. 또 주택은 아무리 공급해도 모자랄테니, 건축 관련 종목에 묻지마 투자가 몰릴 가능성이 크다. 이런 경제 사회적 측면 말고도 골치 아픈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날 텐데, 크게는 인구의 폭발적 증가로 인한 생태계 교란이, 작게는 당장 전세값 폭등이 걱정된다.
순전히 말도 안되는 상상이긴 하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날 뻔 한 적이 있었다. 바로 요한 복음 11장에 기록된 라자로의 부활 사건이다. 라자로가 딱히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성서에 기록이 전혀 없다. 다만 마르타와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누이를 둘 두었고,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는 내용이 전부이다. 만약 라자로가 병들어 죽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라자로가 죽고 나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예수가 베다니아에 도착하니 이미 라자로는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되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대에는 죽은 사람을 곧바로 매장하지 않고 사나흘 뜸을 들였다가 묻었다고 하니까, 숨이 넘어갔을 때부터 쳐서 얼추 일주일 정도로 잡는 것이 무난할 것 같다.
예수님은 왜 울었을까?
여기서 한두 가지 의문이 고개를 든다. 예수님은 왜 마리아와 마르타의 다급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공연히 늑장을 부리신 것일까? 조금 서두르셨더라면 라자로의 병을 간단히 고치실 수 있지 않았을까? 또 예수님은 마리아와 유다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는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라서 눈물을 흘리신다(요한 11, 33). 이것은 무척 뜻밖의 상황이었던 것 같다. 울고 있던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눈물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것 보시오. 라자로를 무척 사랑했던가 봅니다』라고 수군거렸다고 한다.
예수님은 평소에 눈물이 흔치 않았고, 또 다른 사람이 우는 것도 반기지 않으셨다. 가령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올라가시는 길에 여자들이 가슴을 치며 통곡하자, 『나를 위하여 울지 말아라』라고 타이르시기도 했다. 이 구절은 나중에 아르헨티나의 퍼스트 레이디 에바 페론을 주인공으로 한 『나를 위하여 울지 마세요, 아르헨티나여』라는 미국 작곡가 앤드류 웨베의 노래가 크게 히트 치면서 유명세를 타게 되지만, 원래 예수님한테 저작권이 있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유다인들조차 놀라게 한 예수님의 눈물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복음서를 쓴 요한은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라서」라고 쓰고 있다. 성서에서 말하는 비통은 쓰라린 분노와 간절한 안타까움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감정을 말한다. 다시 말해 사랑하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오라비가 죽었기 때문에 동정심이 일어났거나, 친구처럼 생각하던 라자로에 대한 우정의 감정 때문이 아니라, 그야말로 비분과 통분의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비통이 누구를 겨냥했을지 궁금해진다.
적어도 마리아와 마르타는 아닐 것이다. 또 죽은 라자로에 대한 노여움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유다인들이 미웠을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베다니아에 오실 때 일부러 늑장을 부리신 것을 생각하면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이나 자괴감도 눈물의 이유로 잘 들어맞지 않는다.
성서의 등장인물 가운데 아무도 아니라면 혹시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철벽같은 상대에 대해서 비통을 느끼신 것이 아닐까? 예수님이 맞싸우고 이겨낼 상대는 다름 아닌 죽음이고, 죽음의 권세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서로의 아픔과 고통을 나누고 어루만지며 흘리는 뜨거운 눈물보다 더 효과적인 무기가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잘 알고 계셨을 것이다.
왜 다시 죽었을까?
예수님은 마르타를 만나자 마자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런데 마르타는 엉뚱하게도 라자로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다고 예수님께 고백한다. 언젠가 일어날 기적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현재로서는 가늠할 수 없는 불특정한 미래 시점의 가능태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사건을 예고한다.
라자로의 부활 사건은 한 걸음 나아가서 신학자들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를 하나 던진다. 라자로가 되살아난 것까지는 좋았는데 얼마간 잘 살다가 또 죽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부활은 결국 두 번째의 죽음에 굴복하는 불완전한 부활이라고 할 수 있다. 심한 말로 「죽기 위한 부활」의 파라독스 논리의 제물이 되고 만 것이다.
죽음의 족쇄를 풀고 되살아나온 라자로, 그리고 죽음에 무릎 꿇은 라자로는 또 한 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 예수님을 만나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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