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한 구상(具常) 시인은 이승을 떠남으로써 비로소 영원의 세계에 들어선 것은 아닌 듯 싶다. 이미 지난해 「한국문인」(10.11월호)에 유언처럼 적은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자」라는 글에서 세인들에게 이런 깨달음을 친절하게 전해 주었다.
오늘 영원을 노래하는 시인은 그래서 구도자였다. 그런 구도자적 자세는 그의 삶 안에서, 「마음이 가난한 삶」, 「마음을 비운 삶」으로 구현됐고, 그렇게 구도의 정신과 실천이 일치함으로써 「성자 같은 시인」으로 존경받았다.
하지만 구도의 여정이 만만치는 않았다. 「구, 불구(具, 不具)의 변」에서 『인생을 결론부터 출발하였다가 실패하였다는 것은 탕아의 비극-즉 끊임없는 방황을 운명과 약속함이나 다름없다』고 밝혔듯 「모태신앙의 크리스천」이었던 시인은 「저주받은 영혼」이 아닌가 스스로 의심할 만큼 신앙이 주는 「동요」와 「불안」을 고뇌해야 했다.
열다섯에 신부가 될 것을 다짐하고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3년 뒤 나와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니혼(日本) 대학에서 종교과에 입학했다. 여기서 시인은 불교와 그리스도교, 유한과 무한, 신의 존재 등등 구도의 여정에서 부닥치는 문제들과 치열하게 싸우면서 「날마다 신의 장례식」을 지내다 신의 실재에 도달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게 도달한 신앙의 경지에 대해 구상 시인은 「꽃자리」라는 시를 통해 엿보게 해준다.
『앉은 자리가/꽃자리니라/네가 시방/가시방석처럼 여기는/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해방 후 원산으로 돌아온 구상 시인은 동인시집 「응향」(凝香)으로 등단했다. 하지만 수록 작품이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으로부터 반사회주의적이라는 이유로 비판받자 월남해 1948년부터 50년까지 연합신문 문화부장을 지냈고 한국전쟁 때 피란와서 왜관에 정착해 영남일보, 경향신문, 가톨릭신문 등의 편집국장 및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전쟁 후에는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다. 1953년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비난한 「민주고발」이라는 사회 평론집을 펴낸 뒤 시인은 자유당 정권에 의해 체포되고 15년형이 구형됐다. 『사형이 아니면 무죄를 달라』는 시인에게 무죄가 선고됐고 8개월의 감옥 생활이 끝났다. 이후 시인은 일체의 사회적 직책을 맡지 않고 후학 양성을 위한 교수의 길로 매진했다.
그의 시세계는 구도자로서의 삶을 반영한다. 그리스도교적 존재론을 바탕으로 미의식을 추구한 그는 동양의 전통적인 사상과 종교 전통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정신세계를 수용해 신과 인간, 우주의 존재 의미를 탐구하는 작품들을 썼다.
1956년에 발표한 「초토(焦土)의 시」는 한국 전쟁을 다룬 것으로 전쟁의 고통을 초월해 구원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 15편의 연작시로 이 작품은 1957년 서울특별시 문학상, 1980년 대한민국 문학상을 받았다.
구도적인 자세로 초월과 영원의 세계를 탐구해온 구상 시인은 종종 「초자연적 원리」가 문학의 주제로서 외면되는 현실을 서글프게 여겼다.
1981년 5월 가톨릭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시인은 하이데거가 현대를 일컬은 「존재 망각의 밤」이 한국에도 해당된다며 『시인들마저 존재의 제일의적(第一義的)인 형이상적 물음이나 인식에서 비켜서 있다』고 개탄하고 『일상적 경험이나 감각세계의 묘사』에 그치지 않는 『실재를 밝히려는 노력이나 형이상적 인식의 세계』를 강조했다.
홍윤숙(데레사) 시인은 『생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신 분』으로 기억하며 『구심점을 잃어버린 가톨릭 문단의 후배들이 그분의 뜻을 이어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숙제』라고 말했다.
가톨릭문인회 신중신(다니엘) 회장은 구상 시인을 『인간의 존재와 구원을 가톨리시즘과 연결시키려 애썼던 분』이라고 했고 소설가 구혜영(모니카)씨는 『구상 선생님의 문학적 열정과 혼은 후배들에게 길이 남을 것』이라고 애도를 표했다.
신앙과 삶, 예술과 실천이 일치했던 시인 구상. 문학상 시상식에서 축사를 할 때면 작품 속에 깃들어야 하는 진실을 그는 이렇게 강조하곤 했다.
▲ 김수환 추기경이 구상 시인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강남성모병원을 찾아 고인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며 조문하고 있다.
▲ 1994년 11월 9일 서울 한강변에서 거행된 구상 시인의 시비 제막식에서 김추기경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구시인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고 있다.
* 구상 시인의 약력
▲본명 구상준, 세례명 세례자 요한 ▲1919년 서울 이화동 출생.원산 성장 ▲1941년 일본대 종교과 졸업 ▲1942~45년 북선 매일신문 기자 ▲1946년 시집 「응향(凝香)」 필화사건으로 월남 ▲1948~57년 연합신문 문화부장, 승리일보주간, 영남일보 주필 ▲1957~61년 서울대.서강대 출강 ▲1961~65년 경향신문 논설위원 ▲1967년 가톨릭신문 논설위원 ▲1970~74년 하와이대 교환교수 ▲1976~96년 중앙대 예술대 대우교수 ▲1979~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86?93년 아시아 시인회의 서울대 회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고문 ▲저서:시집 「구상」(51), 「초토의 시」(56), 「까마귀」(81), 자전시집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84), 사회평론집 「민주고발」(53), 수상집 「침언부언」(60) 「나자렛 예수」(79), 시론집 「현대시 창작입문」(88), 영역시집 「타버린 땅」(89.런던) 「밭과 강」(91.런던) 등 30여권
▲수상:금성화랑무공훈장(55) 서울시문화상(57) 국민훈장동백장(70) 대한민국문학상 본상(80) 대한민국예술원상(93)
■ 추도사 - 성찬경(사도요한, 시인, 예술원 회원)
크나큰 강처럼 흐른 생애
구상(세레자 요한) 선생님이 떠나셨다. 구 선생님은 워낙 큰 존재이시라 선생님께서 영영 가신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단박에 느끼고 헤아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의 즐거움이나 아픔을, 기쁨이나 비극을, 마치 오누이처럼 더불어서 그날이 그날처럼 지내시는 선생님을 뵈면, 선생님은 살아서 이미 먼 곳에 가 계신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저승도 이승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하게 되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아주 먼 곳으로 떠나신 이제는 오히려 영원히 우리 곁에 돌아와서 계신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이 태어나서 삶을 누리는 목적이 우주의 생명, 근원적인 존재와 하나되는 것에 있다면 구상 선생님은 언제부터인가 그런 경지에 드심으로써 선생님과는 만남이 이별이지만 이별이 곧 영원한 만남이라는 느낌이 실감으로 다가온다.
이제 영원히 떠나신 선생님의 경우 슬픔 중에도 정화된 평화를 느낄 수 있으니, 그것으로써도 선생님의 크심의 일단(一端)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선생님 가신 후 이 큰 빈 자리에서 밀려오는 비애를 가누기 어렵다. 비애의 손길이 닿아 별빛은 좀더 창백해진 것 같고, 공기도 조금은 더 엷어진 것 같고, 흐르는 물소리도 더욱 구슬픈 가락으로 들린다.
구상 선생님의 생애를 몇 마디 말로 짚어보려는 것만큼 무모한 일도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굵은 대목만 생각나는 대로 적어본다면, 선생님은 사람으로서 도량이 무한 크고 남을 이해하는 이해의 깊이에서도 그 끝을 알 수가 없으셨다.
교양인으로서는 동서 고금의 주요한 모든 문화의 핵심을 두루 섭렵하셨다. 종교인으로서는 천주교에 몸담아 하느님의 충직하고 선량한 양이었으며, 동시에 불교적 상념에도 남다른 이해가 있으셨다.
정치 사회인으로서는 남북한의 체제를 아우를 수 있는 넓은 식견을 지녀, 물러서지 말아야 할 때 감연히 싸운 민주투사였다.
문학 분야에서도 넓은 분야에 걸친 방대한 분량의 저술가이면서, 특히 시인으로서는 우리 나라 현대시사에 우뚝 솟은 거목이었으니, 선생님은 시인의 언어 뒤에도 그 말의 내용과 일치하는 등가량(等價量)의 체험과 진실성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는 명확한 시관(詩觀)을 실천하였으니, 기교의 경지를 넘어서는 적확 간명한 수사로써 이 시대에 참된 예언자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풍모에서 선생님을 따를 사람은 없다.
구 선생님은 또 특이한 예술적 재능을 일찌감치 간파하는 혜안을 지닌 분으로서, 이러한 연유에서 맺어진 드문 인연이 공초 오상순선생을 비롯하여 이중섭 화백, 중광 화백, 강주관 서예가로 이어지니, 우리 나라 문화계에 스민 선생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또한 큰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에 앞서 선생님은 마음을 비울 대로 비운 가난한 하느님의 백성이셨으며 (선생님은 관직에의 모든 유혹을 뿌리치셨다), 한껏 이웃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성자(聖者)의 풍모를 생각할 때 첫 번째로 떠오르는 분이시니, 현대와 같은 시대에 선생님과 같은 분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처럼만 여겨지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을 한 사람의 몸 안에서 아우르신 전인적(全人的)인 존재. 선생님은 그 깊이와 넓이와 길이를 헤아릴 수 없는 크나큰 강처럼 흐르고 계신다.
이러한 선생님에 대한 생각을 우리는 앞으로 두고두고 하게될 것이다.
생전에 선생님은 『그리고 내가 그 어느날/ 그 꿈의 동산 속에 들어/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을/ 나는 또한 믿고 있다』고 읊으셨다. 두 손 모아 선생님의 영원한 평화와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