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구제회 활동을 하면서 삶에 의미를 던져준 수많은 이들을 만났는데 예수회 정일우(사도 요한) 신부님도 그 가운데 한 분이다.
신학생 때부터 알고 지냈던 정신부님은 사제품을 받고 서강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계셨는데, 한번은 그 분이 청계천 판자촌에서 지내신다는 말을 듣고 찾아간 적이 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정신부님을 직접 찾아뵙기까지 내 마음 속에서는 「설마…」 하는 의구심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그냥 놀고 먹고 있어요』
나의 갑작스런 방문에 정신부님이 내놓으신 말씀이었다. 수돗물은 고사하고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신부님의 쪽방에는 달랑 사과궤짝 하나와 담요 한 장, 성서 한 권이 전부였다. 그가 외국인만 아니었다면 영판 동네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에 알아보지도 못할 것만 같았다. 나도 결혼 후 연탄을 때는 9평 전세방에서 어렵게 살고 있던 터였지만 신부님이 그런 모습일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놀라서 어안이 벙벙해있는 내게 신부님은 긴 설명도 않으셨다. 무슨 도움이라도 되어드릴 수 있을까 해서 나선 걸음이었는데 신부님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슨 사업을 펼치고 계신 것도 아니었다. 그냥 찢어지게 가난한 이들 속에서 가난한 이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사는 거예요!』
정신부님의 말씀 속에는 철저하게 가난한 이가 되지 않고는 가난한 이들과 나눈다는 것도 허위에 지나지 않는 일이라는 가르침이 녹아있는 듯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청계천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정신부님이 가난한 이들과 똑같이 철거에 밀려다니시는 모습을 보아야 했다. 나중에는 철거민들 틈에 끼여 서울 양평동과 상계동을 거쳐 경기도 시흥 신천까지 쫓겨다니시는 모습도 지켜보아야 했다. 지금도 그분을 따르는 이들이 적지 않은 모습을 볼 때면 하느님께서 주신 카리스마와 영성을 느끼게 된다. 누구에게 강권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동화되어 가는 속에 신부님은 나같은 이들을 조금씩 「행동가」로 변화시켜 놓으신 모양이다. 이런 경험이 하나둘씩 쌓여 오늘의 내가 있게 된 셈이다.
그러던 1974년 오랫동안 이 땅에서 사랑의 씨앗을 뿌려온 가톨릭구제회가 한국으로부터 철수하게 됐다. 철수 통보를 받은 한국 주교단은 당시 교황청 사회복지평의회 위원이자 협동교육연구원장을 맡고 있던 박희섭씨와 나를 아시아 까리따스 대륙 총회에 파견하여 각국 까리따스를 참고로 「한국 까리따스」의 구체적 설립안을 제출하도록 했다.
1974년 11월 필리핀 마닐라로 향했다. 도착 즉시 여러 나라에서 온 대표들은 빈민들과 함께 일주일동안 현장생활 체험을 하게 되었는데, 나는 마닐라의 유명한 빈민지역인 톤도에서 쓰레기를 뒤지며 생계를 잇고 있는 가정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 체험은 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 날 주일미사를 빈민 공동체와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그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체험 활동 후 일주일은 아시아의 저명한 신학자들의 강의, 각국 대표들의 발표와 토론으로 이어졌다. 이 시간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헌신이 어떻게 신앙과 연결되고 있는지를 이론적으로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짧은 일정이었지만 이 생활체험과 신학적 학습은 나의 삶을 가난한 이들에게 투신하게 만드는 제2의 세례성사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돌아오는 길에 필리핀과 홍콩의 까리따스를 견학했다. 그리고는 한국 까리따스 설립 계획서를 성안하여 주교회의에 제출하였으며 박희섭씨도 나름대로의 계획안을 별도로 제출하였다. 이로써 한국 까리따스가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