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구제회가 철수하면서 1974년 말 운현궁 안에 있던 사무실도 지금의 사회복지위원회가 있는 장충동의 안주교님 사저로 옮기게 됐다. 74년 8월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구속되셨던 지학순 주교님이 옥고를 치르고 이듬해 2월 15일 석방되자 주교회의는 지주교님을 한국 까리따스 총재로 임명해 까리따스 설립을 일임했다. 지주교님은 박희섭씨와 나의 까리따스 설립안을 통합하는 작업을 내게 맡기셨다. 나는 애초 기안했던 대로 장기적 관점에서 우리나라의 가난한 이들은 우리 교회가 도와야 한다는 정신을 담아 까리따스 헌장을 만들었다.
이 때 나는 여러 제안 문서에서 사회에 대한 교회의 본질적 소명을 강조하기 위해 처음으로 「사회사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교회의 복음과 사회적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헌장을 중심으로 그 해 6월 26일 주교회의 임시총회가 지주교님이 지으신 「인성회(仁成會, Human Development Committee)」라는 이름으로 한국 까리따스 설립을 정식 인준함으로써 한국교회는 이웃과의 나눔에서 새 지평을 열어가게 됐다.
당시 아시아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후 교황 바오로 6세(1897∼1978)가 『모든 발전의 중심이 인간이 되어야 함』을 역설한 회칙 「민족들의 발전」(1967년 3월 26일)에 영향을 받아 대변혁의 시기를 맞고 있었다. 가난한 이들에게 헌신하는 교회상을 새롭게 제시하고 각국 교회가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성회는 그러한 아시아교회의 조류를 담아냈다.
75년 11월 안주교님이 은퇴하시고 미국으로 돌아가시자 인성회 일은 전적으로 내게 맡겨졌다. 인성회가 벌인 첫 활동은 당시로서는 구름 잡는 일 같았지만, 우리나라의 가난한 이는 우리 신자들이 도와야 한다는 의식부터 깨우치는 것이었다. 당시는 나라도 교회도 모두 가난해서 남을 돕는다는 인식이 희박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인성회는 각 교구 대표자들의 회의를 통해 77년 2월부터 전국적인 사순절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때 처음으로 주님수난 성지주일 전 주 금요일에 단식재와 전국적인 공동헌금이 시작됐다. 또 신자의식 계발을 위해 엄청난 분량의 자료를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과는 쉬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고착된 의식을 바꾼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사회복지위원회 총무신부도 인성회가 설립되고 10년이 훨씬 지난 80년대 말에야 나올 정도였다. 이 일을 하며 나는 가난한 이들에게 제대로 다가서기 위해서는 교구 조직이 절실함을 느끼게 됐다.
또 인성회는 당시 해외의 원조를 평가하고 추천하는 역할을 했는데 대부분의 원조가 현금이어서 상당한 투명성과 전문성이 요구됐다. 보통 원조를 받는 이는 자기주장을 하기 힘든 데 나는 이들의 불평과 불만을 들어주는 조정자 역할도 했다. 한번은 유럽교회의 한 원조기구가 너무 일방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를 보여 원조에 대한 잘못된 자세임을 비판해 사과를 받아낸 적도 있었다. 이 일을 하며 나는 원조가 선심을 베풀거나 우열관계로 설정돼서는 안 되며 파트너관계임을 확고히 하게 됐다.
아울러 나는 원조 받는 이들에게도 엄한 원칙과 기준을 제시해 해외 원조단체들로부터 원조사업의 엄정성과 객관성을 인정받게 됐다. 이로 인해 한국에 대한 원조가 꾸준히 늘어날 수 있었다.
우리 사회의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의 손길이 이어지다 보니 선진교회 원조의 대부분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는 사회운동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농민을 비롯해 노동 빈민 사목 등이 자연스럽게 성장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로 인해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해 권력으로부터 늘 감시를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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