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과 추기경
수년전 김수환 추기경은 KBS에서 도올 김용옥이 맡고 있는 논어 강의 프로에 초대 손님으로 출연하셨다. 그 때 「가톨릭신문」은 이를 이렇게 보도했다.
『김수환 추기경이 그리스도교의 인간관과 공자의 인간관에 대해 2시간 동안 국민들에게 강연했다. 김 추기경은 4월 24일 오후 4시 서울 여의도 KBS 본관에서 공개 녹화로 진행된 「도올의 논어 이야기」에 특별 출연해 「공자는 하느님이 계시고 그 하느님의 뜻인 천명을 알 때에 비로소 이상적 인간인 군자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고 지적하고 「공자는 하느님을 떠난 인간은 있을 수 없고 하느님을 부정한 인간관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인간관과 공자의 인간관은 충분히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가톨릭신문」, 2001년 5월 6일).
여기서 인용된 추기경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후 맥락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위 내용은 도올 김용옥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도올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추기경의 답변을 유도했다.
『나도 신(神)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 신이 인격신(人格神)이라는 점에서는 회의적입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짧은 질문이었지만 숨은 의도가 깔린 질문이었다. 인격신에 대해 회의한다는 것은 유일신, 나아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따라서 창조주 하느님을 부정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결국 도올은 이 말을 통해 이 세상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것이며, 신(神)은 따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우주 안에 편만하게 존재하는 신성(神性)일 따름이라고 주장한 셈이다.
추기경께서는 이 물음에 우회적으로 답하셨다. 추기경께서는 그리스도교에서 인간의 최종 목표는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공자의 천인합일 사상과 연결된다고 말씀하셨다. 또 그 일치에 이르는 길이 그리스도교에서는 「사랑」이라 하고 유교에서는 「인」(仁)으로 보기 때문에 서로 통하는 점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답변은 얼핏 들으면 도올의 질문에서 비껴간 듯이 들리지만, 실제로는 도올이 평소 주장하던 바를 포괄적으로 반박하는 논지였다. 그 까닭은 이렇다. 평소 도올은 논어(論語) 속에 분명히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진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이들을 거부하거나 외면하여 왔다. 그래서 천명(天命)이나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위한 군자(君子)의 노력, 그 일환으로서의 인(仁)의 형이상학적 의미에 대해서는 아예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폄훼하였다. 자기 마음에 드는 내용만 과장되게 부각하면서 논어 전체의 틀을 왜곡한 것이다. 그런데 김추기경께서는 도올이 의도적으로 회피하던 천(天), 천명(天命), 인간 존엄의 천부성(天賦性) 등에 대하여 명백하게 언급하셨던 것이다. 이는 결국 도올의 사상에 대한 포괄적인 비판인 동시에 인격천(人格天)에 대한 설파인 셈이었다.
요컨대, 추기경께서는 서슬 퍼런 범신론적 무신론의 칼을 들고 빈틈을 노리던 저 논객(論客)을 매정하게 되받아 치지 않고 포용하시면서 논박하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대자대비하신 구원섭리에 대한 확신에서 『인간으로서 참되게 사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다 구원해 주신다!』는 맺음말을 하셨다. 필자가 이해하기로 이 마지막 진술에는 분명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 사상이 깔려있었다. 즉, 표면상으로는 예수를 믿지 않더라도 내용적으로 곧 삶으로 예수를 믿는 이는 누구든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수 있으며, 이런 사람은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상이 바닥에 흐르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앞으로 자세히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추기경과 개신교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추기경의 이 발언에 대하여 개신교계에서 두 가지 극단적으로 상반된 반응이 일었다는 사실이다. 성균관 대학에서 유학을 전공한 배요한 목사(당시 예장통합 군목)는 100분간의 토론에서 추기경께서 원숙하게 도올을 상대하셨던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79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동양고전에 대한 나름대로의 구성적인 이해와 이 사회의 문제, 신앙의 문제를 연관해서 말하는 그의 태도는 사회의 어른으로서의 원숙함과 진지함이 담겨 있었다고 평가하고 싶다』(국민일보 2001-04-28)
배목사는 도올은 「이 사회에서 존경받는 어른 중의 한 사람인 김추기경을 내세워」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하려 했던 반면에, 김추기경께서는 「차분하고 조리있게 그리고 때로는 유머도 섞어가면서」 도올의 저의를 「참담한 실패」로 돌렸다고 결론지었다.
이에 반하여 일부(제발 그러기를!) 개신교신자들은 도올과 추기경의 전체 대화에 관심 갖기 보다는 추기경의 마지막 발언만 뚝 떼어 내어 이를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로 매도하였다. 이런 관점은 의학박사 차한의 「성경으로 세상보기」(도서출판 건생)에 잘 소개되어 있다. 추기경의 발언에 대한 비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차한은 한걸음 더 나아가 알렉산더 히스롭의 저술 「두 개의 바빌론」(The Two Babylons)를 인용하며 추기경의 종교다원주의적 발언이 단지 바빌론 신비종교와 혼합하여 사탄의 하수인이 된 가톨릭교회의 공식입장을 재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못 박는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한국 종교문화의 한 단면을 만난다. 곧 세 가지 다른 입장이 팽팽한 긴장 속에서 공존하고 있음을 본다. 도올의 범신론적 무신론, 김추기경 및 배요한 목사의 포괄주의적 유일신 신앙(분명히 추기경의 진술은 이 입장이다! 그리고 개신교에도 이 입장을 취하는 신학자들이 많이 있다!), 추기경의 관점을 종교다원주의로 매도하는 일부 개신교인의 배타주의적 신앙이 그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다원문화의 지대에 들어선 셈이다. 앞으로 우리는 이 지대에서 얼마간 머무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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