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사 신약성서를 읽는 듯한 이 편지는 베드로의 후계자, 제4대 교황(90/92~101?)인 글레멘스 1세(Clemens I, 30?~101?) 즉, 로마의 글레멘스가 공동체의 분열 위기에 휘말린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글이다. 그는 이 편지에서 젊은이들이 사제단의 몇몇 원로들을 몰아냄으로써 자칫 공동체가 깨어질 처지에 놓인 고린토의 신자들이 주님 안에서 하나로 일치해 사랑의 공동체를 이뤄나갈 것을 권위 있게 권고하고 있다.
사도시대 이후의 문헌들은 신약성서와 같은 환경과 같은 신학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고대 교회는 이 작품 가운데 일부를 경전으로 여겨왔었기 때문에 이 시대의 문헌에 속하는 작품의 범주를 결정하는 것은 쉽지도, 분명하지도 않다.
성인이자 초세기 로마의 주교, 교황으로서 글레멘스는 95년경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교회 공동체의 통치와 질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조목조목 서술하고 있다. 이 편지는 2세기까지 거의 한 세기 동안이나 고린토 교회의 신자들에게 있어서 교회법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더욱이 그의 저작으로 지칭되는 여러 문서들이 당시 교회 안에서 신자들에게 읽히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고린토인들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두 번째 편지가 그의 저서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연구를 통해 판명됐다.
글레멘스는 베드로, 리노, 아나글레토에 이어 제4대 교황이 됐고 도미시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에 순교했다. 로마 콜로세움 옆에는 그에게 봉헌된 성당이 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로마의 글레멘스는 구약과 신약의 예를 들어 이러한 분쟁과 그 분쟁의 원인이 되는 불목과 시기를 꾸짖었던 것이다. 그는 사랑과 평화와 순명으로써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하며 공동체의 분열을 막아 평화를 회복할 것을 촉구했다.
편지는 총 65장에 이르는데, 그 중 논쟁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부분은 비교적 적은 부분에 그친다. 이 부분에서 글레멘스는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전례 규범과 교계 제도의 질서에 근거해 장로들이 면직됐다는 사실과 소동의 주동자들에게 회개를 요청한다. 이러한 본격적인 권고에 앞서 글레멘스는 편지의 앞부분에서 편지 집필의 동기를 짧게 언급한 뒤, 시기와 질투에 대한 긴 훈계, 겸손과 평화, 일치와 조화를 위한 권고 등 다양한 내용의 가르침을 전한다.
이 편지는 신약성서 다음으로 오래된 초대교회의 문헌이다. 이 서간의 이름이 신약성서에 나오는 사도 바오로의 고린토 전서와 같은데, 사실 이 서간이 쓰여진 배경과 시간이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두 서간에 있어서 거의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서간들을 통해서 우리는 초대 교회에 있어서 교회의 교도권이 정착되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알 수 있다. 사실 사도들이 순교함으로써 교회 안의 권위에는 다소간 혼란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즉 사도들로부터 세워진 교회의 지도자들, 즉 교도권이 도전을 받았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 편지에서 로마 주교의 개입, 즉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는 방식과 정립되는 과정이 엿보인다. 즉 사도시대부터 각 지역교회는 그 지역의 책임자인 주교에 의해 관리되어온 것이 관례였는데, 무엇때문에, 어떤 권위로 로마의 주교가 멀리 있는 고린토 교회의 문제에 관여하게 됐는가 하는 것이다.
글레멘스는 서간에서 고린토 교회의 소동에 대해 늦게 알게 된 것을 유감이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권고를 듣지 않으면 하느님께 중대한 죄를 짓게 된다』고 경고하고 『성령의 감도에 따라 말하는 것이니 순명하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발언들을 통해 우리는 이 서간이 로마의 주교, 즉 교황의 수위권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형성되기 시작했는지를 보여주는 최초의 문헌임을 알 수 있다. 로마의 주교는 베드로 사도로부터 직접 안수를 받은 후계자로서 다른 지역 교회의 주교들보다 더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으며 이 권위는 후에 교황의 수위권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