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메이킹의 속셈
지난 번의 논지를 종합해보면, 도올은 이미 「결론」을 갖고 학문을 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 결론이란 『우주를 설명하고 인간 존재를 해명할 수 있는 마지막 언어는 기(氣)』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기철학이다. 어떤 새로운 정보도 그에게는 이 결론을 변증하기 위한 시녀에 불과하다. 요즈음 MBC TV에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최한기」라는 인물을 세계적인 사상적 선구자로 띄워주고 있는 것도 자신의 「기철학」 홍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종강을 목전에 두고서 동학(東學)의 창시자 「최수운」을 세계적인 성현(聖賢)으로 과장하여 추켜세우는 것도 결국은 동학사상이 그의 「기철학」 개진에 걸리적거리는 서학(西學)을 깨부술 「꿩 잡는 매」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도올의 끊임없는 스타메이킹(starmaking)의 진짜 이유이다.
지난 6월 7일자 MBC TV 특강에서 궁극적으로 그의 표적은 서학, 곧 그리스도교 신앙(엄격한 의미에서 서학은 천주교를 의미하지만 이날 도올은 서학을 기독교와 같은 범주로 언급하였음)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사람은 얼마나 될까.
도올은 동학의 경전에 해당하는 용담유사를 풀이하던 결론부에서, 아니나 다를까, 최수운의 성경(誠敬)과 시천주(侍天主) 개념이 서학에서의 초월신을 부정한 대안적 신관이었다고 극찬하였다. 곧 뜬 구름 잡는 초월세계의 신이 아닌 인간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내재적 신(이것이 그의 기철학에 쓸모 있는 부분!)을 얘기하는 최수운이야말로 얼마나 위대하고 얼마나 솔직한 종교가이냐 하는 식의 열변이었다. 도올은 이 대목에서 목소리를 높여가며 수운과 대조를 이루는 인물로 동시대 중국의 황제 홍수전(1814~1864)을 언급하였다.
잠깐 강의의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도올은 이 중국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종교로 받아들이고 호화생활을 하던 어느 날 비몽사몽 중에 천당에 갔다 왔는데 거기서 「예수와 그의 부인」을 보았다는 둥 횡설수설하다가 마침내는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는 3류에도 못 미치는 야사를 늘어놓는다.
여기서 그는 얼렁뚱땅 얘기하는 듯 하면서 두 가지 왜곡된 정보를 청중들에게 주입시킨다. 첫째, 「예수와 그의 부인」 얘기를 의도적으로 반복하면서 『예수는 부인이 있다』더라 하며 무책임하게 세뇌시킨다. 둘째, 봐라, 그리스도교라는 것이 멀쩡한 사람을 돌게 하여 있지도 않은 천당을 가봤다는 허황된 말이나 하게 하고 결국에는 자살을 방조하지 않았느냐 하며 「그리스도교 신앙=허구적 환상」이라는 등식을 주입시킨다. 도올은 끝으로 그리스도교를 믿던 저 중국황제는 호화생활을 하는 타락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최수운과 동학교도들은 박해와 순교를 당할 만큼 민중의 편에서 진실된 삶의 자세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로 마무리를 짓는다.
60분간의 매직쇼는 그리스도교 곧 서학을 「타락한 지배자를 위한 허황된 종교」로 낙인찍고, 최수운을 「민중의 고난을 대변한 위대한 세계적 종교가」로 둔갑시키고, 이로써 도올 자신의 「기철학」이 설 자리가 더욱 튼튼해지면서, 우레와 같은 갈채 속에서 막을 내린다.
금기된 접근법
왜 도올은 최수운의 비교대상으로 그와 동시대를 산 한국 그리스도교인(천주교인-당시 개신교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음)들을 거론하지 않았을까? 당시의 정치적?사상적 질곡으로부터 해방과 평등을 꿈꾸며 천주신앙을 받아들여 그보다 더 처참하게 순교한 수 만 명의 천주교 순교자들을 굳이 모른 채하고서 왜 꼭 남의 나라 황제의 엽기적인 일화만을 언급하며 천주신앙에 대해 비아냥거려야 했을까?
학문에서 가장 비겁한 것이 「삶의 자리」(Sitz im Leben)가 전혀 다른 것들을 동일한 잣대로 비교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도올은 최수운의 민중적 수난을 치켜세우면서 동시대 한국 천주교인들에게서는 시비 걸 것이 없으니까 슬그머니 「삶의 자리」를 중국으로 옮겨서 꼭 3류 저널리스트들이 하듯이 「스캔들」 하나를 침소봉대하였다. 이런 방식은 도올이 걸핏하면 써먹는 치사한 수법이다. 이는 학문적 접근법이라고 할 수 없다.
정당한 학문적 접근이 되려면 일차적으로 비교하는 것들의 범주(category)가 같아야 하고, 이차적으로 각각의 「삶의 자리」가 고려되어야 한다.
이는 도올이 그토록 강조하는 해석학(hermeneutics)의 기본이다. 그런데 도올은 이 규칙을 어기고 있다. 반칙을 하고 있다. 그 결과 독자들로 하여금 유사성(類似性, likeness)을 동질성(同質性)으로 혼동하도록 호도하고 있다. 이점이 바로 김호환 목사가 「도올의 콘택트렌즈」에서 도올의 문제점으로 꼽고 있는 부분이다. 김목사는 도올이 『동질성과 유사성을 오해하지 말라』는 비교종교학의 금언을 깨뜨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도올이 학자라면 마땅히 최수운의 비교 대상으로 비슷한 시대, 비슷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천주교 사상가들인 이벽이나 정약용 쯤을 거론했어야 했다. 여기서도 엄정한 룰이 있다. 한 쪽의 국가대표 1군과 다른 쪽의 국가대표 2군을 비교해도 안 된다. 이 정도만 해 줬어도 도올은 신사였다. 하지만 도올은 그러지 않았다. 동학(東學)에서는 최선의 모범(example)을 갖다 댔고 서학(西學)에서는 최악의 스캔들(scandal)을 뒤져내어 비교하였다. 이는 페어플레이가 아니다. 아니 레드카드를 받아 마땅한 반칙행위이다.
형이상학, 의도적 외면
도올은 자신의 기철학에 반대되는 사상이면 무엇이 되었건 부정하는 입장에 선다.
그러니까 도올이 그리스도교를 그렇게도 독 오른 뱀처럼 물고 늘어졌던 것도 그의 기철학에 그리스도교가 가장 큰 훼방꾼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우주=기」로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창조주 하느님의 존재, 그리스도교의 내세(천국)신앙은 가장 거추장스러운 적이었던 것이다.
그의 적은 그리스도교 뿐이 아니다. 어느 사상, 어느 종교가 되었건 형이상학(形而上學)적 관점 곧 초월, 내세, 추상, 관념을 논하는 모든 발상은 무조건 허구요 기만이요 오류라고 몰아부친다. 이는 그의 일원론적 기철학이 형이하학(形而下學)적 관점 곧 내재, 현세, 구체, 경험만을 실재(reality)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올은 그가 그토록 신봉하는 노자의 도사상에서 발견되는 형이상학적 기술(예컨대 도덕경 25장)을 적당히 얼버무리면서 넘어가고, 불교나 유교 문헌에 제시된 형이상학적 사유를 의도적으로 외면한다. 학문을 하는 데에 이런 처사는 「페어플레이」의 규칙을 어기는 행위에 속한다.
이 점이 도올이 욕을 얻어먹는 이유다. 왜 그가 노자를 논하면 노자 연구가(대표적으로 이경숙, 「노자를 웃긴 남자」)가 들고 일어나고, 그가 불교를 논하면 불교계(대표적으로 변상섭, 「김용옥선생, 그건 아니올시다」)에서 반발하고, 그가 유교를 논하면 유교계(대표적으로 이기동-배요한, 「도올 논어 바로보기」)가 논박하고, 그가 기독교를 논하면 기독교계(대표적으로 김호환, 「도올의 콘택트렌즈」)가 분노하는가?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의 일원론적 기철학을 변증하기 위해서 어떤 영역에서든지 「통합」적인 조명을 피하고 아전인수격으로 「부분」적으로만 원용(援用)하는 접근을 일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국 전체를 왜곡하는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다.
학문에서 뉴만 추기경의 다음과 같은 말은 백번 타당하다.
『전체를 받아들이지 않고 부분만을 받아들이는 것은 오류이다』
우리는 사이비 종교라는 것들이 오만가지 「부분」들을 조합해 놓은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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