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8일 오후 5시 서울 영등포에 위치한 요셉의원. 남루한 차림의 한 노숙자가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섰다. 진료봉사를 끝내고 퇴근을 준비하던 유우금 수녀(73.메리놀수녀회)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몇 달 전 알코올 중독에 따른 간 경화로 자신에게 치료를 받고 간 김씨였기 때문이었다. 왜 다시 병원을 찾은 걸까?
『유 할머니, 나 이제 술 안 먹어요. 술 냄새도 못 맡아요. 모든 게 다 할머니 덕분이에요. 다음주부터는 이삿짐 센터에서 일하게 됐어요. 하하. 고마워요 할머니』
말이 끝나자마자 무섭게 오렌지 주스 캔 하나를 툭 내던지고 황급히 나가는 김씨. 김씨의 거친 손은 지금으로부터 꼭 20년 전 「달걀」과 「야자수 열매」를 건네던 한 아프리카 여성의 검은 손과 겹쳐졌다.
독실한 불교집안서 수도자로
유우금 루시아 수녀. 올해 일흔 셋의 그녀의 일생은 「한국판 슈바이처」로 불릴만 하다. 한밤의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고 풍토병이 넘쳐나는 아프리카 케냐 오지에서 처절한 한계 상황을 극복하고 20년 동안 원주민에게 의술을 펼쳤기 때문이다. 「의사수녀」로 살아온 지난 50여년의 삶, 그러나 그 과정은 순탄치 만은 않았다.
1931년 독실한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 한때 작가를 꿈꾸던 그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의과대학에 들어가 레지던트 과정을 밟던 중, 미국인 선교사를 만나 59년 스물 여덟의 나이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밀워키 위스콘신 대학 부속 성모병원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하던 그는 한 선배의 권유로 세례를 받고, 마침내 메리놀수녀회에 들어가 수도자가 된다. 그리고 가족들이 병원 개원까지 준비해 놓은 고향을 뒤로하고, 68년 검은 대륙 아프리카로 자원해 떠난다.
검은 대륙 척박한 곳으로 자원
이때부터 유수녀의 파란만장한 고난과 희생의 의료선교가 시작된다. 특히 수녀가 찾아간 키난고 지역은 케냐 의사들조차도 근무를 꺼리는 척박한 곳이었다. 출산 때 녹슨 가위로 탯줄을 잘라 신생아들이 파상풍으로 죽어가고, 수술보조원들은 피를 보고 그 자리에서 졸도할 정도로 의료시설이 열악했다. 가뭄이 들었을 때는 병원에서 약 대신 빵과 우유를 나눠줘야 했다.
유수녀는 병원 문을 열고 처음 맞은 신생아 환자가 사망했을 때를 잊을 수 없다.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아이의 부모는 수녀를 감동시켰다. 『수녀님,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이 애를 하느님이 데려가시기로 작정했다면, 수녀님이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유수녀가 아프리카를 떠나던 날. 원주민들은 『마마 웨뚜!(우리들의 어머니) 가지 마세요』라며 울면서 매달렸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행복
케냐 의료봉사를 마친 유수녀는 90년대에는 다시 중국으로 날아가 7년여간 의료봉사와 중국동포 젊은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보냈다. 지난해 1월 한국에 돌아온 수녀는 서울 가양동 메리놀수녀원에서 성소 모임을 지도하면서 요셉의원에서 의료봉사를 펼치고 있다.
유수녀는 『늘그막까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것이 그저 행복하고 감사할 뿐』이라며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걷고 싶다』고 강조했다.
유수녀는 최근 케냐 생활을 중심으로 자신의 일생을 정리한 자서전 「케냐의 어머니 유 루시아 수녀」(해누리/504쪽/1만원)를 펴냈다. 지난 96년 「마마웨뚜 가지 마세요」란 제목으로 냈다가 절판된 책에 내용을 더했고, 직접 영문으로 쓴 영문판을 함께 엮어 한.영 합본판이 됐다. 영어판은 미국 메리놀수녀회 지원자들을 위한 선교 교재로 사용될 예정이다. 6월 22일 가족과 지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한 출판기념회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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