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목포상업학교는 정원이 50명이었는데 그 중 한국인 학생은 25명을 선발했다. 다 아는 문제들이라 깊이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시험을 치렀는데 결과는 낙방이었다. 지금처럼 재수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 때부터 나는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농사일은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아 열성을 쏟지 못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우편통신으로 와세다대학 강의록을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에는 강의록을 공부하고 우편통신으로 시험을 쳐 합격하면 중등학교 졸업 자격을 인정해주는 제도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농사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면소재지나 더 큰 읍인 영산포에 나가 신문이나 잡지, 책 등을 구해다 독학을 했다. 읍내에서 구할 수 없는 책은 우편으로 주문해 보기도 했다.
책은 시골에 파묻혀 있는 나를 다른 세상으로 안내해준 길잡이였던 셈이었다. 제대로 된 스승 하나 없는 촌구석에서 책을 통해 처음 넓은 세상을 접했고, 혼자 힘으로 책이 알려주는 길을 찾아 다녔다. 이 때 시작된 책 읽는 습관은 팔순을 넘긴 지금도 여전하다. 그렇게 3년 넘게 공부에 몰두한 결과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시험에 통과한 후 더 큰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일본 유학을 꿈꾸었지만 아버지의 반대가 심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일제의 징용바람은 조용한 시골도 비켜가지 않았다. 당시 19살이던 내가 남달리 투철한 민족의식을 지닌 것은 아니었지만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였던 것처럼 일제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관공서에 취직하면 징용을 피할 수 있으리란 계산에 금용조합 서기 시험을 보게 됐다. 금융조합은 구한말인 1907년에 시작돼 56년까지 존속한 서민을 위한 신용금융기관이었는데 주로 농민과 지방 중소상공업자들에게 금융 지원을 해주는 역할을 했다.
시험에 합격해 처음으로 부임한 곳은 집에서 30리 정도 떨어진 전남 함평군 나산의 금융조합이었다. 시골에만 묻혀 살아온 내게 이 일은 보편적 인식의 세계로 의미있는 걸음을 내딛는 중요한 전기이기도 했다. 「어설픈 민족주의자」로서의 의식은 이곳 생활에서도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했다. 한번은 술자리에서 무의식중에 우리말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내게 술을 끼얹는 게 아닌가. 나이가 나보다 많은 일본인 이사였다. 이렇게 해서 커진 싸움은 패싸움으로까지 번졌다. 당시 상황에서 일본인과 싸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모르는 데다 싸움 동기가 「국어상용 위반」이라는 명백한 불법행위로 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일본인 이사가 더 이상 문제를 삼지 않아 넘어갈 수 있었다.
이 해 나는 내 일로 평생 노심초사하면서도 가정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온 두살 아래의 아내 박귀순을 일생의 배필로 맞았다. 결혼한 지 4년 만에 첫 아들을 얻었는데 이 때야 비로소 나는 처자식의 건사와 부모 봉양을 책임져야 하는 한 집안의 가장이라는 인식을 지니게 됐던 것 같다.
아내는 부모님들껜 외아들인 나보다 더 흡족한 며느리였다. 나를 대신해 농사일이며 집안일을 빈틈없이 챙겼고 나중에 대전으로 분가할 때까지 15년이 넘는 세월을 객지를 떠도는 남편을 대신해 모자람 없이 시부모를 모셨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이 땅의 상황도 나날이 암울해져가자 내 가슴속에서 움트기 시작한 애국심도 그만큼 강해져갔다. 일제에 대한 반감은 더 심해져서 툭하면 일본인들과 싸움을 벌이기 일쑤였다. 어찌된 까닭이었을까, 그 때마다 주위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이 또한 무슨 뜻이 아니었을까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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