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후 200여년이 지난 2세기말경, 그리스도 신학의 중요한 거점 도시 중 하나인 알렉산드리아에는 이미 수준 높은 신학과 교리교육을 실시하는 교리학교가 있었다.
초대교회 시절 알렉산드리아는 로마,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와 더불어 가장 큰 국제도시로 손꼽혔다.
동방교회 신학 발전의 토양을 마련한 숱한 논쟁들을 촉발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대표적 인물인 그리스 교부 오리제네스(Origenes, 185~253). 그는 클레멘스(Clemens Alexandrinus, 150?~215?)와 함께 바로 알렉산드리아 교리학교가 배출한 가장 걸출한 인물이었다.
에우세비오(Eusebius Caesariensis, 260/265?~339)가 자신의 「교회사」에서 그를 일러 『가르친 바를 실제로 실천했고, 실천한 바를 가르쳤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생활을 모방하려 했다』고 묘사했듯이, 그는 엄청난 저서를 남기고 숱한 강의를 통해 신학과 철학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가르침을 스스로 실천한 인물로 전해진다.
위대한 교부들의 반열에서도 그는 가장 뛰어난 인물로 꼽히며, 백과사전과 같은 방대하고 깊이있는 지식을 갖추고 놀라울 정도로 창의력을 발휘했던 천재적인 학자로 평가된다. 그의 생애와 학문, 업적에 대해서는 초대교회의 어느 교부들보다도 많은 것이 전해지고 알려져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부친 레오니데스가 202년에 순교, 어머니가 옷을 감추며 외부 출입을 막고 나서지 않았다면 아버지를 따라 순교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오리제네스는 그 후에도 자신의 순교에 대한 열망을 평생 동안 지니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오리제네스는 당시 교리학교의 교장이었던 클레멘스가 박해로 인해 피신 중이었기 때문에 데메트리오 주교는 203년에 교리학교의 책임을 오리제네스에게 맡겼다. 그후 오리제네스는 28년 동안 교장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지내면서 학문과 교수, 그리고 신앙의 실천에 몸바쳤다. 이 때의 교리학교 생활은 그의 생애에서 전반기에 해당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혀 그리스도교 문제에만 전념하기 위해 비종교적인 모든 책을 팔아치웠고 가능한한 많은 학문에 몸바쳤으며 복음의 말씀에 그대로 따르기 위해 단식과 고행, 근면과 절제의 삶을 살았다. 더욱이 그는 마태오 복음 19장 12절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거세를 하기까지 했다.
그가 교리학교에서 가르친 학문은 수사학, 물리학, 수학, 지리학, 천문학, 철학과 신학 등 그야말로 다방면이었다. 학생들이 많아지게 되자 세례지원자 강의를 헤라클라스에게 맡기고 자신은 교양있는 이교인들을 선교하기 위해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신학과 철학에 몰두했다.
30대에 저술활동을 시작한 그는 많은 여행을 하면서 당대의 지식인들과 교류했다. 로마에서 당시 교황인 제피리노(199~217?)와 로마 최고 신학자로 꼽히던 히폴리토(Hippolytus, 170~236)를 만났고 팔레스티나의 가이사리아와 예루살렘에서 주교들과 만나 교분을 맺었다. 황제의 모친 율리아 맘메아의 초청을 받아 안티오키아에 가서 가르치기도 했다.
이러한 고위 성직자와 귀족들과의 교분은 그가 누린 명성과 존경을 나타내지만 그러한 교제는 반면 중요한 논쟁들의 원인을 제공했고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와 결별하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231년경 그리스 아카이아 지방의 주교들이 그곳 이단자들과 토론의 자리를 마련하고 오리제네스를 초빙했다. 그는 팔레스티나를 거쳐 그곳으로 가던 중 가이사리아에서 그의 옛 친구인 알렉산데르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는다. 이에 대해 알렉산드리아의 데메트리오 주교는 주교 회의를 통해 그가 받은 사제품을 무효라고 선언하고 그를 파문했다.
이로 인해 오리제네스는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가이사리아로 가서 그곳 주교의 배려로 20여년 동안 신학 연구와 제자 양성을 계속했다. 바로 이때부터 그의 생애에 있어서 후반기가 시작된다.
다시금 학교를 세운 오리제네스는 가르침과 함께 엄청난 양의 저서들을 써내려갔다. 그의 경제적 후원자인 암브로시오가 그에게 7명의 속기사를 주어 그의 말을 받아 적게 했는데, 후일 예로니모의 증언에 다르면 그의 저서가 모두 2000권에 달한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중에서 많은 저서들이 유실됐다.
그는 젊은 시절 순교의 기회를 놓쳤지만 데치우스 황제(249~251)의 박해 때에는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된다. 그는 체포돼 고문을 받았지만 당시 박해자들은 유명 인사가 배교를 할 때 그 효과가 크리라는 생각으로 그를 죽이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다.불굴의 정신으로 박해의 고통을 이겨낸 그는 후유증으로 건강을 잃고 이후 얼마 안돼 세상을 떠났다.
오리제네스는 아우구스티노를 제외하고는 고대교회에서 가장 많이 저술한 인물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자신과 그의 작품에 관한 후대의 논쟁 때문에 저서 가운데 많은 그리스어 원본이 소실됐다. 더욱이 4세기에 루피누스가 친오리제네스적인 관점에서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부분들을 수정했기 때문에 그의 라틴어 번역본들은 신중하게 이용돼야 한다는 지적들이 있다. 하지만 작품 목록과 수많은 단편들, 그의 저작들은 여전히 많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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