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는 사이 해방이 찾아왔다. 나는 몇 개월 후 금융조합에 사표를 던졌다. 일제의 징용을 피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택한 일이었기에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던 것이다. 직장을 그만 둔 내 가슴에 밀려들기 시작한 것은 공부에 대한 열망이었다.
마침 광주에 대학교가 새로 생긴다기에 여기에 진학할 뜻을 품고 아버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처자식까지 둔 아들이 살림 맡을 생각은 않고 더 공부를 하겠다는 것을 마뜩지 않게 생각하셨지만 결국 허락하고 마셨다.
46년 9월 훗날 조선대학교가 된 광주야간대학원이 문을 열자 곧바로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정치학과를 택한 것은 별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졸업 후 교편을 잡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막연히 품고 있었을 뿐이다.
이렇게 한해를 보내고 이듬해가 되자 세상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뭔가 하나쯤 삶의 디딤돌이 될 만한 것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일기 시작했다. 그래서 궁리 끝에 내린 결론이 변호사의 길이었다. 당시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변호사 시험이나 고등문관 사법과 시험을 통과해야 했는데 나같이 전문학교 이상을 수료하지 않은 사람은 먼저 조선변호사 예비시험부터 치러야 했다. 도전 1년만에 예비시험에 합격한 나는 본격적인 본시험 준비에 들어가 전쟁 중이던 52년 부산에서 치러진 제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뜻을 정한지 5년만의 일이었다.
법관으로서 첫발을 뗀 것은 53년 3월 광주지방법원 사법관 시보가 되면서였다. 시보 생활을 하면서도 변호사 사무실이나 하나 내서 가족을 돌보고 기회가 닿으면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만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마음먹고 있던 내 삶의 행로가 바뀐 것은 광주지법 부장판사로 있던 김제형 판사와의 만남으로 인해서였다. 김판사의 간곡한 설득으로 결국 나는 뜻을 바꿔 54년 5월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본격적인 법조계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이 때 평생의 지기이자 동지였던 고 유현석 판사를 만났다.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 우리는 마음은 물론 손발까지 척척 맞아 늘 같은 부에서 배석판사로 동고동락을 함께 했다. 유판사는 독실한 신자여서 하루를 삼등분해 8시간은 근무하고 8시간은 집에서 지내고 8시간은 성당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유판사는 한번도 내게 입교를 권유한 적이 없다. 이 시절 유판사의 소개로 대전교구 오기선 신부님도 알게 됐다. 그 뒤 친구처럼 스스럼없는 사이가 된 오신부님도 내게 가난한 이들과 예수의 삶을 비친 적은 있어도 성당에 나오란 말은 한 적이 없었다. 다만 우리는 밥을 먹으면서든 술자리에서든 교회법과 사회법을 비교해가면서 그리스도의 삶을 나누곤 했다. 이야기의 주제는 성서 지식에서부터 윤리신학이나 교회사에까지 미치지 않는 데가 없었다. 종교가 없던 나는 이런 지인들 덕에 자연스럽게 교리와 성서 속 그리스도의 삶에 젖어들 수 있었던 셈이다. 아마 이들은 언젠가는 내가 제 발로 하느님을 찾으리란 사실을 알았던 모양이다.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나는 많은 삶의 진리를 배우게 됐다. 거짓말 속에서 진실을 가려내기란 쉽지 않다. 정확하고도 풍부한 법률적 지식은 기본이요 여기에 삶의 이면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을 지녀야 후회하지 않는 판단을 할 수 있다. 그러자면 축적된 인생경험이 필수적이다.
훌륭한 선배들과 지인들의 도움 속에 별탈 없이 판사 생활을 하던 내게 또 한번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서울 지방법원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이로써 촌놈이었던 나는 마흔이 다 되어서야 세상의 중심으로 나오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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