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도올비판의 막바지에 이르러 그리스도교의 고유성과 관련된 문제 하나만은 짚고 넘어갈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 문제란 다름 아닌 인격신(人格神)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말한다. 도올은 그리스도교의 인격신을 부정한다. 「노자의 하나님」은 「불인(不仁)의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은 조립시화(造立施化)의 하나님, 곧 「조작하여 은혜를 베풀지 않는」(노자와 21세기(상), 244쪽) 하나님이다. 도올의 말을 들어보자.
『노자의 하나님은 불인(不仁)하다. 인간의 믿음과 소망에 답하는 기독교의 하나님과는 그 모습이 다르다. (중략)노자의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 노자의 하나님은 은총의 하나님이 아니다. (중략)조선의 백성들이여! 21세기의 개화된 민주의 백성들, 과학의 백성들이여! 질투하는 편협한 하나님을 믿겠는가? 소리 없이 스스로 그러하신 너그러운 하나님을 믿겠는가? 노자는 또 말한다. 천지가 불인(不仁)한 것처럼 성인(聖人) 또한 불인(不仁)해야 한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백성들을 어여삐 여기고 사랑하고 베풀고 교화하는 대통령을 좋아할지 모른다. 노자는 말한다. 모름지기 대통령은 은혜를 베풀면 안 되고 백성을 사랑한다 생각하면 아니 된다. 그는 인자하면 아니 된다. 그는 잔인해야 한다. 자기 당이라 편들고, 선거전에 자기에게 괘씸하게 굴었다고 미워하고, 정적(政敵)이라 해서 그 능력이 있음에도 인정치 않고 무조건 음해하기만 한다면 과연 지도자의 자격이 있겠는가? 천지불인! 성인불인!(天地不仁! 聖人不仁!) 그 얼마나 통렬한, 핵심을 찌르는 반어(反語)인가!』(노자와 21세기(상), 244쪽)
이처럼 도올은 「야훼」 하나님은 비개화되고 비민주적인 우매한 백성들, 비과학적인 백성들이나 믿는 「질투하는 편협한」 하나님이라고 맹공을 퍼붓는다. 반면에 노자의 하나님은 「소리없이 스스로 그러하신 너그러운」 하나님으로 숭앙받는다. 전문용어로 표현하자면 도올은 서양에서 18~19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도입된 「이신론」(理神論: deism)적 관점으로 그리스도교의 「인격신」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곧 신을 사랑과 은총을 베푸는 주체인 인격신(人格神)으로서 파악하는 것 보다 묵묵히 우주운행의 원리로만 작용하는 이신(理神)으로 파악하는 것이 더 개화된 관점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그의 논지가 논리적인 반론이 요구되는 주장이 되지 못함을 안다. 어차피 중립성을 상실한 일방적 선택의 성격이 짙게 스며있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필자 자신도 중립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함을 고백한다. 필자의 입장 역시 이미 확고하게 선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론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필자의 견해를 피력하는 정도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요점은 세 가지이다.
첫째, 인(仁)의 역기능만을 볼 것이 아니라 인의 순기능을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도올이 노자가 믿는 「불인(不仁)의 하나님」을 추켜세운 이유는 만일 하느님이 인(仁)을 베풀면 편협하게 한쪽을 편들어 다른 쪽이 상대적으로 박탈감에 빠지게 되는 위험이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는 인(仁)이 사심(私心 내지 邪心)에서 행해질 때의 극단적인 문제만 부각시킨 것이다. 곧 인(仁)의 역기능만 클로즈업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도올은 인(仁)이 정의(正義: Justitia)에서 우러날 때 발생하는 구원적인 의미를 전혀 외면하고 있다. 곧 인(仁)의 순기능을 도외시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묻고 싶다. 만일 도올 자신이 억눌린 자, 억압받는 자, 막다른 골목에 처한 자, 절망의 늪에 빠진 자가 되어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신음하며 울부짖는 것 밖에 없게 된다고 해도, 아무런 반응을 못하는 이 목석같은 「불인(不仁)의 하나님」을 찬미할 것인가? 그 무감각, 그 무능력을 궤변적으로 칭송할 수 있는가? 단지 불인(不仁)한다고 하여, 가나안 바알의 신당에 놓여 있는 죽어 침묵만을 지키는 다르곤의 신상들(1사무 5, 4) 및 850명의 바알 무당들이 엘리야 예언자와 대적하여 자신의 몸을 자해하며 피 흘리기까지 불러도 대답 없던 무능의 신(1열왕 18, 30~40)을 「스스로 그러하신 너그러운 하나님」으로 찬미할 것인가? 단지 인(仁)을 행하였다고 하여, 에집트 파라오 치하의 잔혹한 강제노역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킨 「야훼」를 「자기 당이라고 편드는」 편협한 하느님으로 몰아붙이는 것이 과연 최소한 상식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있는가?
노파심에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에집트 파라오의 종살이에서 구출해내신 것은 「질투하는 편협한」 하느님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에 의한 것이건 어떠한 억압과 착취, 인권유린도 용납지 않으시는 절대 정의(편드는 상대적 정의가 아님!)의 하느님이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야훼의 「질투」는 정의이며 진리라는 사실이다. 그동안 도올은 누가 그를 비판해도 대응하지 않았다. 자신은 독보적이므로 누구든 자신과 맞서는 것 자체를 용납치 않는다는 태도였다. 만일 도올이 이런 자신의 「태도」를 성찰할 줄 안다면, 야훼가 왜 「질투」할 수 밖에 없는지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야훼의 질투는 상대적인 것 앞에서 「절대」가 갖는 질투, 우연적 존재 앞에서 「필연적」 존재가 갖는 질투이다. 그것은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분명히 하고 선후고하(先後高下)를 가리기 위한 질투이다. 그러기에 야훼의 질투는 정의이며 진리인 것이다. 자임하고 있듯이 도올이 진정한 「사상가」라면 질투를 「편협」으로 밖에 보지 못하는 한계를 반드시 극복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셋째, 우리 모두는 「신앙이 어차피 선택이라면 한번 신중하게 셈을 해 보라」는 파스칼의 충고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인격신(더불어 천국)을 믿고 안 믿고는 결국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다. 이 점을 간파한 파스칼은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죽은 다음에 하느님(더불어 천국)이 있느냐 없느냐하는 것은 어차피 확률이 1대 1이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확률은 똑 같다. 자 그렇다면 도박을 해보자. 서로 반대 경우가 사실이라면 결국 손해는 누가 보게 되는 것인가? 하느님(더불어 천국)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 세상을 함부로, 엉망으로 살았는데, 죽어서 보니 하느님도 있고 천국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인가, 아니면 천국이 있다고 믿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하느님도 천국도 없는 경우의 사람인가? 결국 누가 낭패를 맞이하게 되겠는가?』
인생은 「천하」보다도 소중한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 26) 신앙은 진지하고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체험의 종교, 만남의 종교이다. 일단 신앙을 갖게 되면 넘치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만난다. 착각이나 환상이 아니라 실제로 만난다. 사후에가 아니라 이미 현실로서 만난다. 이는 머리싸움이나 입씨름으로 가름될 문제가 아니다. 마음가짐의 문제이다.
백번 양보해서 설령 그 판가름이 죽은 다음에나 있다고 해도 우리는 선택을 함에 있어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우리는 천재 수학자요 철학자요 영성가였던 파스칼의 충고를 새겨들을 줄 알아야 한다. 『결국 누가 낭패를 맞이하게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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