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저희 복지관은 예수님 통장을 가진 한 자매님으로부터 거금을 후원받았습니다. 제가 전에 있던 횡성 복지관에도 도움을 준 자매님입니다만 이 분은 장사를 하면서 일정부분을 예수님 이름으로 만든 통장에 저축하여 필요한 곳에 희사하는 자매였습니다.
물론 저와는 일면식도 없는 분입니다만 그 자매를 보면서 존경과 함께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따뜻한 인간미를 간직할 수 있는 것도, 또 예수님의 구원 역사가 계속될 수 있는 것도 이웃이 되어 주고자 하는 이러한 고마운 분들의 덕택이라 생각되면서 「스스로 이웃이 되기보다는」 나의 이웃을 되어 줄 것을 강요하는 이기적인 나의 모습에 많은 반성을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4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강도를 만난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비유의 극적인 반전을 위해 이 사람을 유다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복음은 「어떤 사람」이라고 막연히 이야기한다는 점입니다. 국적과 종교 등 그 사람의 신분이 아니라 그 사람이 처한 「현재의 고통」이 문제의 중심임을 강조하는 것이 인물의 익명성이 가지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인물은 사제와 레위인입니다. 사제는 제사와 예절의 집행 등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로서 예수님 시대에는 약 8400명 정도의 사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레위인, 이들은 예수님 시대에 「하급 성직자들」로서 당시 제관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노래와 제물 준비 그리고 십일조를 거두어들이고 성전의 경비와 청소가 그들의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이 상징하는 바는 거룩하고 경건한 이들, 하느님 백성의 대표 인물들입니다.
물론 이들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지 않은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만 중요한 사실은 그 동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요, 다만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돌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이웃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종교적인 지위와 권위가 중요한 점은 아니라는 너무나 소박한 사실을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중부 지역인 사마리아에 사는 혼혈 인종과 여러 종족을 말합니다. 유다인들이 사마리아의 수도 세켐에 있는 가리짐 성전을 파괴한 사건과, 사마리아인들이 파스카 축제 때 예루살렘 성전에 사람의 뼈를 던져 성전을 모독한 사건으로 이들은 결정적으로 갈라집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불경건한 이들의 대표로 보면서 인사와 만남 자체도 거부하고 살던 것이 예수님 시대의 상황입니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사마리아 사람이 이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이 세상에서 사랑의 관계에서 배제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어떤 그럴듯한 이유도 사랑의 실천을 유보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비유가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선 이 비유의 초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비유는 「누가 나의 이웃인가?」 하는 문제로 시작한 주제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인가?」로 초점이 바뀌고 여기에 대한 대답도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대답하면 끝날 것을 「사랑을 베푼 사람」으로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반전은 우선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은 지역적 민족적 종교적 정의를 넘어서는 문제이기에, 이론적으로 정의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라는 구체적 상황 속에서 찾아야 하는 실존적인 문제란 사실을 보여주면서, 사랑의 실천만이 이웃을 정의하는 기준임을 명확히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이웃사랑!」 하느님 사랑과 더불어 신약의 가장 위대한 계명이며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계명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연 상태에서(노력하지 않는다는 의미임) 인간의 눈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처지에 골몰하여 이웃의 고통과 처지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복음의 교훈을 살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눈을 의도적으로 이웃을 향해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이 되어주어야 할 오늘의 강도 만난 사람들을 향해 우리가 의식적으로 눈을 돌릴 때만이 사마리아인의 선행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한 주 구체적인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나의 시간과 물질을 나누려고 노력하는 한 주가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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