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교회가 현 세계의 질서 안에서 빛과 소금과 누룩의 구실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평신도 의안 4항).
꼭 20년 전 제삼천년기 교회를 바라보며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머리를 맞댄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대표들은 급변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날로 중요성을 더해 가는 평신도의 위상에 대해 이런 인식을 이끌어냈다.
평신도에 대해 본격적으로 언급한 최초의 문헌은 1965년 발표된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교령의 주춧돌은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2차 회기이던 1964년에 반포된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에 마련되어 있었다. 교회 헌장은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아, 자기의 고유한 임무를 수행하며 복음 정신을 실천하고 누룩처럼 내부로부터 세상의 성화에 이바지하며, 또 그렇게 하여 무엇보다도 자기 삶의 증거로써 믿음과 바람과 사랑으로 빛을 밝혀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4장 31항)을 평신도의 본질과 사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평신도 의안은 이런 공의회의 정신을 담아 「그리스도와 그의 신비체인 교회 안에서 모든 신자의 일치와 선교 의식」을 하느님 나라를 향해 「순례하는 교회」의 대전제로 삼고 있다.
배경과 의의
현대를 살아가는 「평신도상과 사도직을 내부로부터 조명하고 활력화시키고자 하는 것」(1항)을 목적으로 한 평신도 의안이 담고자 한 정신은 사목회의가 준비되던 시기의 시대상과 무관하지 않다. 평신도 의안은 형식화, 제도화 경향으로 초대교회의 생동성을 잃어 가는 한국교회의 현실에 대한 인식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이런 현실에 대한 평가는 우선 평신도 자신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전제로 한다.
당시 우리 사회는 무력으로 집권한 신군부의 서슬 퍼런 압제에 눌려 신음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한국교회는 1981년 10월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을 맞아 거행된 신앙대회에 이어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아 이뤄진 일련의 사업들을 통해 한국교회사에서 또 하나의 분수령을 맞고 있었다. 특히 대규모 종교 집회를 통해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됐고 대사회적으로는 민주화와 인간존엄성 수호를 위한 신자들의 투신에 힘입어 높은 신자 증가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평신도들의 자의식도 자연스럽게 활성화될 수 있었음은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70년대부터 이어진 한국교회의 대사회적인 역할과 대규모 집회 등으로 활성화된 신자들의 역량은 80년대를 경과하면서 더 이상 승화되지 못하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평신도 의안은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 놓인 평신도의 위치에 대한 자각을 밑거름으로 「평신도의 잠재력을 건전하게 활성화하는 데 이바지」(2항)함으로써 교회 발전의 새로운 추동력을 발견하고자 하는 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구성과 주요 내용
「평신도」 의안은 전체 12개 의안 가운데 마지막 분야인 「사회」와 함께 가장 많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분야이다. 평신도 의안이 담겨진 문헌의 분량은 수도자 의안의 10배, 성직자 의안의 4배에 이르고 있다. 이는 평신도 의안이 사목회의에서 그만큼 고민과 모색의 장이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평신도 의안은 평신도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은 머리말을 시작으로 총 2부에 걸쳐 4개장 160개 항목으로 이뤄져있다. 또 의안 말미에 26항의 제안 사항과 함께 15항에 걸쳐 「가톨릭 여성의 위치」를 별정문제로 다루고 있다.
-제1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시된 평신도상
평신도 의안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하는 평신도상으로 시작하는 것은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문헌들이 공의회 정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공의회 정신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던 현실에 대한 성찰이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평신도 의안은 「넓게는 공의회 전체가 평신도를 위해 있었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3항)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한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공의회의 인식을 상기시키고 있다. 공의회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교회상을 부각시킨 것은 제도로서의 교회를 강조해오던 과거의 이해 방식과 전적으로 다르다.
제1장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평신도와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의 평신도」는 성직자와 평신도간의 수직적 위계질서의 극단적인 강조로 인해 「평신도」는 곧 「병신도」라는 자조적인 말까지 나타나는 결과를 낳고 있는 현실에 대한 평가에서 시작한다. 이어 성직자와 평신도는 다같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공통의 사제직 예언직 왕직에의 참여를 요청받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다만 직위와 직분상의 차이가 있을 뿐임을 강조하고 있다.
제2장 「평신도 사도직에의 소명」은 『세속적 능력은 평신도에게 고유한 것이며 특징적인 것』(24항)임을 밝히고 『교회의 선교의 증인인 동시에 산 도구』임을 역설하고 있다.
특히 평신도와 교계와의 관계에서 『친교로 말미암아 평신도의 책임감이 강해지며 열성이 육성되고 평신도의 힘이 목자의 힘과 합쳐져서 상호 보충함으로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왕국, 그 신비 자체가 영광스러운 종말론적 완성에로 전진하게 된다』며 친교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상을 강조하고 있다.
-제2부 한국교회에 있어서의 평신도상
「오늘의 한국 평신도의 실상」이라는 제목이 붙은 제1장은 교회뿐 아니라 온 겨레에 거대한 도전으로 다가오는 사회 변동에 대한 분석과 평가에 대부분의 항을 할애하고 있다.
▲사회(38항)로 시작되는 이 장은 고도의 경제성장 이면에 놓인 ▲경제 ▲정치 ▲문화 부문에서 드러나고 있는 각종 사회적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과 이로 인한 가치관의 혼란상을 담고 있다. 이와 함께 ▲신자 증가 추세 ▲성소 증가 추세 ▲도시와 농촌 교회간의 격차 등 당시의 교세 현황을 소개하면서 『「전례적 대화」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추구하는 데에 머물고 그것을 세상과의 대화에로까지 연결시키려는 노력이 부족한』(56항) 평신도들의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이어진 항에서 『대다수의 평신도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한 하느님의 백성, 사귐의 신비, 구원의 보편적 성사로서의 교회상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이웃과 더불어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하기보다는 자신의 구원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종교적 개인주의, 이기주의에 빠져있다』며 20년이 지난 오늘의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신자들의 형식주의적인 신앙생활 모습을 비판하고 있다.
나아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관련해 마련한 「사회생활의 성화(聖化)」 부분에서는 평신도들의 고유성과 십자가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자성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59항에서 『오늘의 평신도는 사회생활의 모든 환경을 그리스도적으로 변혁시키는 것, 즉 사회생활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상호간의 신뢰를 회복시키는 것이 자신들의 고유한 임무임을 깨닫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이야말로 평신도 사도직의 존재 이유이며 사제의 사도직으로는 대신할 수 없는 것임을 인식하고 있다』며 평신도들의 정체성을 밝히면서도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임무를 대인선교의 차원에 국한시켜 이해하고 있을 뿐 사회의 각 분야에 있어서 최대의 과제가 우리 시대의 사회문제의 긴박성과 중대성을 미루어볼 때 그리스도교적인 사회 질서를 건설하는 일임을 확실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59항)고 평신도들의 의식 수준을 평가하고 있다.
특별히 61항에서 『오늘의 평신도는 이러한 사회적 사도직을 수행함에 있어서 조직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매우 미온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 같다』며 『사회 구원을 위한 교회 활동의 정당성에 대하여조차 아직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교회가 부당하게 고유의 영역을 이탈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는 평가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평신도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게 다가온다.
평신도 의안의 목적과 지향점은 두번째 장인 「미래의 평신도」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시대는 변화하고 우리 사회의 모습도…변동의 추세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다』(103항)는 표현으로 시작되는 「미래의 평신도」는 사회 변동의 미래상을 제시하고 『평신도들이 교회의 발전을 위해 자신들의 쇄신과 교육을 최우선적인 요인으로 보고 있는 것은 이제까지 교회의 사명에 대해 방관자적 입장을 취해온 것을 심각하게 반성하며 미래에 있어서의 「능동적인 참여」를 다짐하는 굳은 결의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장에서 의안은 45개항(115∼160항)에 걸쳐 한국 천주교회의 토착화를 위한 사목적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의안은 토착화를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이 되는 예수의 육화(肉化)에 기초를 둔 것』이라고 이해하고 한국교회가 추구해야 할 신앙의 토착화 작업은 『한국의 전통과 현실 안에서 복음의 진리를 보다 적합하게 선포하고 생활화하는 작업』(121항)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의안은 토착화를 위해 ▲동양의 종교 전통을 존중하는 자세로 배우고, 그리스도적 안목에서 평가할 수 있는 교육의 실시 ▲전례의 토착화 ▲신학의 토착화 ▲영성의 토착화 등 4가지를 제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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