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에서 도올비판을 종결해야 할 듯싶다. 고백하거니와 그동안 도올이 그리스도교와 관련하여 무차별적으로 쏟아냈던 지엽적인 비판들에 대해서는 거의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지면의 제약도 받았고 또 꼭 그래야할 만큼의 가치도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말고」 식의 트집잡기 글들을 수집해놓은 의도적인 왜곡과 폄훼에 일일이 대응한다는 것이 부질없는 노릇으로 여겨지기도 했던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도올이 자신의 전공영역에서는 어떠한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리스도교에 대해 언급할 때에는 공인된 논거를 제시하지 않고 신빙성이 검증되지 않은 「스캔들」 파헤치기식 접근을 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도올의 태도가 객관성을 상실한 감정적인 반감(反感)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았다. 이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김호환 목사의 지적에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공감하리라 여겨진다.
『저는 선생의 언어의 폭력성을 언어가 담고 있는 능력의 한계 때문이라고 줄곧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이해의 폭으로 다 가릴 수 없는, 진실을 가장한 선생의 언어의 콤플렉스는 선생의 정신적 외상(外傷: 필자 삽입)으로 기인한 것이라 탓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가 「창녀의 소생」(노자와 21세기(3), 19~22)이라는 선생의 언어는 진실을 탐구하려는 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정신적 외상에서 형성된 뒤틀린 우월 의식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정신적 외상은 세상을 보는 선생의 눈과 종교관을 지나친 혐오감으로 혹은 편애로 굴절시키고 있습니다.
때문에 선생이 박학다식하게 인용하고 있는 모든 철학 사상이나 종교에 대한 이해에 대해 감탄을 하면서도, 편견과 부정확한 개념 파악으로 얻어진 지식으로 다른 이들을 특이한 자기논리로 비판하고 있는 선생에 대해 세인들이 주는 고충 어린 충고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선생은 화자(話者)가 자신의 주장을 말할 때 자기주장의 분명한 위치를 상대방에게 알려야 함을 잘 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자신의 위치를 자기 편의에 따라 바꾸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이 사용하고 있는 지식의 정보는 그 정보가 지닌 정확한 개념 파악과 주류를 인용하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보가 지닌 공인된 일반적인 지식을 인용하지 않고 오직 그 정보에 대한 지엽적인 것이나 부정적인 가능성 따위를 그 지식의 주류인 양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듣는 이들로 하여금 혼란과 오해를 갖도록 하는 일입니다. 폐일언(蔽一言)하고, 저는 선생에 대한 저의 느낌을 어떤 스님이 쓰신 책의 제목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김용옥 선생 그건 아니올시다!」』(「도올의 콘택트 렌즈」, 183~184쪽).
좀 길지만 한 자 한 자가 필자의 생각과 일치하기에 그대로 인용하였다. 김호환 목사는 한국, 독일, 미국 등지에서 철학과 신학을 깊이 공부한 학자이다. 그러기에 김목사는 소위 입심보다는 전문가적인 안목으로 이런 지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톨릭 철학계의 견해는 어떠할까? 필자는 철학계에서 형이상학 분야의 거두인 정의채 신부께 고견을 청하여 들은 적이 있다. 일생을 철학 탐구에 정진하여 독자적인 경지를 구축한, 교계 원로이며 개인적으로는 필자의 은사이기도 한 정의채 신부는 다음과 같은 학문적 견해를 피력하였다.
『학문이라는 것은 고색창연한 문화유산과 같습니다. 장구한 역사 속에서 벽돌이 한 장 한 장 쌓여져 건물이 된 것입니다. 세월의 풍상을 겪으면서 지혜가 배어들고 이끼도 끼고 하여 거대한 문화가 창출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철학이라는 것, 종교라는 것, 신학이라는 것들은 책 몇 권 읽고 그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것들이 아닙니다. 10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대학자들이 「한 우물」만 파서 달성한 경지들이 집성되어 일련의 학문적 전통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노, 토마스아퀴나스, 보나벤뚜라, 칼라너 등이 이룩한 학문체계는 결코 책 몇 권 읽고 비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날 세계적인 지성인들은 모두가 옛날 식민지시대의 정복자적인 접근법을 지양하고 동서융합해서 하나의 세계를 이루려고 대화를 모색합니다. 동이 서를, 서가 동을 비난하는 것은 이제 어리석은 일이며 시대착오적인 발상입니다. 만일 누가 그런 발상을 조장하고 선동한다면 그것은 젊은이들을 후퇴시키는 결과를 자아내는 불행입니다』
결국 정의채 신부는 「학문」 나아가 「전문영역」의 본래적 권위를 존중할 것과 「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셈이다. 새겨듣건대, 이는 21세기 한국 지성을 대표하는 조언이 아닐 수 없다. 맞다. 이는 정곡을 찌르는 지혜다. 신학을 전공한 필자도 「신학」 안에서조차 전문영역이 아니면 감히 언급을 삼간다. 그만큼 조심스러운 것이 학문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도올은 한신대학에서 4년간 삐딱하게 배운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그리스도교의 전문영역을 넘나들면서 전문가 행세를 하는가. 무슨 배짱으로, 무슨 무식으로 그런 무모한 일을 도모하는가. 어쩌자고 가설적 트집거리 몇 개를 가지고서 지금도 예루살렘에서, 로마에서, 곳곳의 대학 연구실에서 밤새워 연구하는 내로라하는 수많은 성서학자들의 학문적 성과를 그렇게 경박하게 뒤집으려 하는 것인가.
이런 식의 무모함은 비단 그리스도교와 관련해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그러기에 고려대 영문학과 서지문 교수와 성균관대 유교학과 이기동 교수는 「논어」 계시편에 나오는 다음의 말로써 도올에게 충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군자는 천명을 두려워하고 대인을 두려워하고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소인은 천명을 몰라서 두려워하지 않고, 대인을 함부로 대하며, 성인의 말씀을 업신여긴다』(「도올 논어 바로보기」, 5쪽).
전문영역 및 전문가의 존중은 생활문화 전반에서도 학문에서도 필요하다. 이것이 무시되면 나라를 망치고 미래를 망친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각 분야 최고의 세계적인 전문가를 배출하는 데 달렸다. 노벨상이 무엇인가? 전문가들에게 주는 상이다. 우리는 우리민족 가운데 노벨상 수상자가 배출되지 못하고 있음을 애석해 할 일이 아니라, 전문가 및 전문영역을 외경(畏敬)하는 풍토가 형성되어 있지 못함을 더 안타까워 할 줄 알아야 한다. 도올신드롬은 한국이 안고 있는 문제를 드러내주는 대표적인 계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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