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기경 서북 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중심으로한 아프리카 교회는 로마 교회를 훨씬 능가하는 뛰어난 신학자들을 배출했다. 이들은 당시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그리스도교에 고대 로마 유산 및 로마인들이 계발한 사고방식들, 그리고 그들의 자부심을 도입해서 교회를 풍요롭게 가꾸어 갔다.
카르타고의 주교였던 치프리아노(?~258)는 교회 분열에 저항, 교회 일치 운동에 큰 공적을 남긴 순교자로서 아프리카 교회의 대표적 교부중 하나다. 또한 아프리카에서 가장 유명한 순교자로 기억되고 있으며 교회, 사목, 성서, 동정 그리고 배교자 문제에 관하여 수많은 신학 논문을 남겼다.
비그리스도교 집안에서 태어나 훌륭한 사회 교육을 받는 등 비교적 윤택한 교육 환경 조건속에 성장한 치프리아노는 학교에서 문학과 수사학을 배워 그리스도교에 입문하기전 수사학 교사로 이름을 떨쳤다.
세례를 받은 것은 40대 중반이었던 246년경. 성서와 사제 체칠리아누스의 영향이 회심에 결정적 계기가 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재산의 대부분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변화의 모습을 보였고 그리스도교에 귀의했다는 사실은 카르타고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세례후 얼마되지 않은 249년 초 카르타고의 주교로 선출된 치프리아노는 이때부터 성서와 테르툴리아노의 저술에 심취, 깊은 신학적 지식을 쌓아 나갔다. 테르툴리아노는 라틴 신학의 기초를 놓았다고 평가될 만큼 「라틴 신학의 아버지이며 삼위일체 정식의 틀을 만든 인물」.
한편으로 뛰어난 지도자적 자질과 교회를 향한 사랑으로 신자들의 기강을 바로 잡고 삶의 방식을 개선해 나갔다. 특히 249년 데치우스(Decius)의 박해로 피신을 한 후에는 피신처에서 서간을 통해 교구를 보살필 만큼 신자들을 보살피는데 열과 성의를 다했다.
그렇게 박해로 인해 약해지고 흩어진 신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던 치프리아노는 251년 피난지에서 돌아온 후 255년 256년 두차례에 걸친 시노드를 통해 『이단자들이 베푼 세례는 무효이며 이교도들은 재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요구하는 주장을 펴서 아프리카 주교들의 지지를 얻었다.
즉 카르타고의 주교로서 아프리카 교회 수장이었던 그는 주교들 뜻을 모아 「교회에 관련되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그 교회의 성사를 주관할 수 없다」는 전제로 재세례에 대한 입장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 의견은 당시 로마 교회 경우 이단자들이 교회에 돌아올 때 안수로써 공동체에 받아들였던 상황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로마의 주교 스테파노와는 서간으로 논쟁을 벌이며 서로를 파문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와중에 로마 황제는 크리스찬들의 모든 집회를 금지하고 모든 주교와 사제, 부제도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 예식에 참여토록 요구하는 칙서를 내렸다. 이를 완강히 거부한 치프리아노는 카르타고에서 조금 떨어진 쿠루비스로 유배되었다.
그 다음 해 258년 모든 주교와 사제 그리고 부제들을 사형에 처하라는 황제 칙령이 발표됐고 치프리아노는 끝까지 이방신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기 거부함으로써 참수당하고 말았다.
치프리아노의 업적은 「서방 교회 최초의 주교 저술가」 「라틴 문학의 선구자」로도 불려질만큼 뛰어난 저술을 남긴 점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소논문과 서간을 중심으로한 저술들을 통해 당시부터 높은 인기를 지니고 있었던 그는 고상한 문체를 선보여 「그리스도인 키케로」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중 교회와 주교와의 관계에 있어 진정한 일치에 관해 서술한 소논문 「교회일치론」(De catholicae Ecclesiae Unitate)은 유명하다. 그는 이 논문에서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이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아프리카가 「분열」의 어려움을 겪고 있던 상황에서 교회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분열에 대항, 끊임없이 투쟁한 그의 일면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또한 교회의 중앙 집권화에 반대 하고 북아프리카 지역 교회의 특수성을 옹호했던 치프리아노는 「성서의 사람」이라 할 정도로 그리스도교에 귀의한 후 항상 성서와 더불어 살았으며 「세 증언록: 퀴리누스에게」에서는 교리교육이나 유다인들과의 논쟁을 위해 체계적으로 성서 본문들을 뽑아 정리해 두기도 했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그의 65편 서간들은 교회일치론 등 그의 저술들 못지않은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데 당시 문제시되던 로마의 수위권, 이단자들의 세례, 유아세례, 카르타고 공동체의 일상과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 성체에 관한 63번째 서간 등은 소논문이라 할 만큼 신학적 비중을 지닌 내용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공동체에 보내는 편지에서는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그는 공동체의 주교로서 교회를 위해, 그리고 교회를 증거하기 위해 죽음을 맞이한다는 자의식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영웅적이라 할만큼 당당하게 순교의 칼을 받았던 그는 「진정한 사목자로서의 면모를 보인 교회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지닌 주교들 가운데 한사람」으로 칭송받고 있다. 저술 작품들 역시 교회 역사 안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필사되었으며 출판 번역된 것 중 하나로 남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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