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이런 식의 무례한 편지를 받는 것이 처음은 아닐 것이라 생각됩니다. 혹여 이 글이 심기를 건드린다면 안 읽으셔도 무방하겠습니다. 『또 피라미 하나가 흥분했구나!』하고 옆으로 제쳐놓으신단들 불만스러이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글 쓰는 이는 일개 가톨릭교회의 사제입니다. 가톨릭교회를 대표할 입장은 못 되지만 그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동시에 교인들을 위한다는 충정에서 도올 선생의 그리스도교 비판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릇이 크지 못한 부덕의 소치로 격을 넘는 일을 벌인 것이 아닌가 하여 저어되기도 하였습니다마는 말입니다.
용서를 청합니다
정직하게 말해서 글 쓰는 이는 도올 선생을 잘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도올 선생의 책 몇 권 읽고 아는 체 하면서 「가톨릭신문」의 지면을 통하여 도올 선생의 사상이라고 스스로 파악한 바를 가지고 거기에 비평을 가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과 사상에 대하여 「주관적 인식」이라는 필봉을 휘둘러 댔습니다. 폭력을 가한 것입니다.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그랬던 면이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가급적이면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만 우리 쪽의 입장을 해명해보려 노력했습니다마는 모르는 사이에 도를 넘은 부분도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혹은 정보의 부족 때문에, 혹은 사량(思量)의 미흡함 때문에, 혹은 이해지평의 차이 때문에, 혹은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 때문에, 왜곡으로 기울지 않았으면 편견으로 치달았을 수 있습니다. 모두가 의도치 않은 결과입니다. 용서를 청합니다.
번거로운 일이겠으나 지적해 주신다면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도올 선생 자신이 아닌 다음에야 글쓰는 이의 이해에 한 점의 오류도 없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필자는 인정합니다.
동시에 글 쓰는 이는 똑같은 오류가 도올 선생에게도 발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한 번 생각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도올 선생이 수집한 반기독교 자료들이 과연 100% 검증된 것인지, 도올 선생은 과연 그리스도교의 모든 개념을 정말 있는 그대로 이해했다고 자신할 수 있는지 한번쯤은 생각해 봐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글 쓰는 이는 도올 선생이 그동안 그리스도교를 비판하기 위하여 애써 찾아낸 「썩은 나무」와 「뒤틀린 나무」들이 어느 산맥, 어느 산봉오리, 어느 숲에 위치해 있는 것인지 아실 것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일부러 눈감지 않고서야 그 주변의 「곧은 나무」들이 숲, 산, 산맥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으리라 믿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문제는 도올 선생의 눈에 있는 것입니다. 눈앞의 현상이 문제가 아니라 보는 이의 시력이 문제인 것입니다.
절대 다수가 「있다」고 보는 것이 「없다」고 보이고, 모두가 「곧음」으로 보는 것이 「뒤틀림」으로 보이고, 사람들이 「진실」로 보는 것이 「거짓」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주관적인 착시일 개연성이 큰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것이 도올 선생에게는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것이라면 모든 곧음이 뒤틀림으로 보이고 모든 진실이 허위요 기만으로 보인단 말입니까. 어떻게 2000년간 그리스도인은 다 속아서 살았고 도올 선생만 안 속아 사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동안 인간의 건전한 상식과 건전한 양심은 뭐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서양(西洋) 것이라서 틀려먹었고, 동양(東洋) 것이라서 옳다는 관점은 과연 문제가 없는 것입니까. 글 쓰는 이는 동양 것이라서 틀려먹었고, 서양 것이라서 옳다는 입장을 취하기에는 「객관적 진리」에 대해 더 강한 집착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게 편가름 하기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 너무나 소중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꼭 동양인이라서 동양의 사상을 편애하는 것은 우연과 필연을 맞바꾸는 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어있음으로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이구요.
도올 선생의 저작과 강의가 현대 한국사회에 가져온 긍정적인 평가를 글 쓰는 이는 일부러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간 선생께서 동양사상과 한국전통사상에 대해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전통문화의 회복에 기여한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도 박수를 보내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간 있었던 그리스도교에 대한 도올 선생의 비판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기를 굳이 믿고 싶습니다. 또한 「21세기와 노자」 마지막 강연 때 낭독하였던 글 중 기독교에 대한 메시지가 도올 선생의 본심이기를 바랍니다. 공개서한이므로 이래야만 정당할 것 같아서 전문을 싣습니다.
애정 어린 충고
『우리 민족은 내가 허약하다고 느꼈을 때 과감하게 타를 수용할 줄 알았습니다. 조선왕조 말기에 이미 남인(南人)들은 조선조 성리학이 공리공론에 빠져 민생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을 개탄하고 새로운 과학문명의 젖줄이요, 근세적 인간구원의 활기였던 기독교를 과감하게 독자적으로 수용하였던 것입니다. 남인들이 기독교를 주체적으로 흡수한 과정은 이 지구상 가톨릭 선교의 역사에 있어서 자외적(自外的)으로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내적(自內的)으로 기독교를 흡수한 유일한 선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또다시 환인?환웅?단군의 홍익인간의 드넓은 마음으로 인간세의 보편주의를 실천하여 근세적 민주의 대세에 참여하였습니다. 기독교의 사랑의 보편주의를 과감하게 수용함으로써 일제의 학정에 항거하였으며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고 과학적 사유를 익히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기독교와 더불어 우리는 과학(science)과 민주(democracy)를 수용하려 했던 것입니다.
복음이란 「복된 소리」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 복된 소리가 화를 불러일으키는 소리가 되고, 기쁜 소식이 슬픈 소식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불행한 역사적 환경속에서 잘못 형성된 유다민족 특유의 선민의식이 조선기독인들의 독선과 아집과 배타와 전도주의의 온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유다교의 율법주의를 거부함으로써 사랑의 보편주의와 홍익인간의 초민족(超民族)적 구원을 외친 예수와 사도 바오로의 복음의 메시지를 위배하는 비기독교적 이단행위들을 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온유하며 교만치 아니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구한말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천막속에 모인 조선인들에게는 면사포를 거두고 남·여·노·소가 같이 얼굴을 마주대고, 한곳에 앉아 찬송하며 기도할 수 있다는 그 사실 하나가 그들의 삶을 불사르고도 남을 감격이며 구원이었습니다.
이러한 감격과 구원의 모습이 어느 샌가 사라져버리고 이제 한국의 교회는 독선과 아집과 권력과 탐욕과 권세와 권능의 자부감속에 안주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대인의 우환과 심려를 폭력으로 묵살하려하며, 정당한 비판과 지적을 비난과 사기로 엄폐하려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교회는 성황당의 근대적 변용이라는 나의 신학적 테제를 정당화하는 비졸(鄙拙 : 비속하고 치졸함)한 짓만을 일삼고 있습니다』
글 쓰는 이는 신구(新舊)를 막론하고 그리스도교계가 도올 선생의 애정 어린 충고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도올 선생의 그 사랑이 변치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혹독한 질정의 사랑을 넘어 온후한 포용의 사랑으로도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도올 선생,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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