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인간이시며 참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다.
교회 역사상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훼손하는 이단들이 적지 않았다. 4세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우스주의는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이단 사상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는 당시 많은 귀족과 주교들의 추앙을 받던 인물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본래부터 신의 아들이 아니며 단지 신성을 지닌 하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의 구원이라는 그리스도교의 교의를 훼손했다.
니체아 공의회(325)는 이러한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했으나, 아리우스와 그 일파는 콘스탄틴 대제에게 접근하는데 성공했고 콘스탄티누스 2세(337∼340) 때에는 전 로마제국에 횡행할 만큼 그 위력을 떨쳤다.
이러한 아리우스주의자들에 대항해 그리스도교 정통 교리의 수호자로 나선 이가 바로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Athanasius Alexandrinus, 295?~373)였다.
성인, 교회 학자로, 증거자로서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였던 그는 고대가 낳은 가장 위대한 주교들 중의 한 명이었다. 마치 화강암과도 같이 조금이라도 타협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말 그대로 원칙의 인물이었던 그는 저항 운동가의 풍모로 기억된다.
295년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318년경에 부제품을 받은 뒤 알렉산드레 주교의 비서가 되었다. 바로 이때 아리우스주의의 논쟁이 발생하고 교회 안에서는 정통 신앙의 뿌리를 흔드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325년 알렉산데르 주교를 수행해 제1차 니체아 공의회에 참석했으나 당시 그는 부제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공의회에서 공식적인 발언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와중에도 뒤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며 안티오키아의 에우스타티오(Eustathius)와 안치라의 마르첼로(Marcellus) 등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하던 신학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328년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그의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임명의 해이다. 그해 4월 17일 주교가 사망하고 아타나시오가 후임자로 내정되자, 엄격주의자인 멜레티우스 이단자들을 따르던 이들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좌를 차지하려고 시도했다.
이에 따라 아타나시오를 따르던 이들이 급히 비공식적으로 주교좌에 그를 올림으로써 적지 않은 잡음이 생겨났고, 그를 반대하던 이들은 그를 비합법적인 주교로 간주했다. 하지만 결국 콘스탄틴 대제(306~337)는 아타나시오의 주교 축성을 인정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서른이었다.
하지만 대제는 이와 함께 자신이 유배지에서 불러온 아리우스(Arius, 256?~336)를 공동체에 받아들일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아타나시오는 단호하게 이를 거절함으로써 멜레티우스 이단과 아리우스주의자들을 거슬러 자신의 교구를 지켜나갔다.
아타나시오는 자신의 교구 안에서 니체아 신경이 제시하는 정통 신앙을 뿌리내리고 수호해나갔다. 하지만 그는 이후 끊임없는 고난을 겪게 된다. 아리우스를 추종하는 이들은 335년 티로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해, 아타나시오의 해임을 결의하고 황제는 그를 트리어에 감금했는데, 이것은 그가 일생 동안 겪게 될 다섯 차례 유배의 시작이었다.
두 번째 유배는 339년 4월 16일부터 346년 10월 21일까지였다. 그리고 356년부터 362년까지, 362년부터 363년까지, 또다시 365년부터 366년까지 아타나시오는 끊임없이 유배의 고난을 겪어, 주교로 지내던 46년 동안 20년을 유배지에서 보냈고 373년 5월 2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애 중 많은 저술을 남겼다. 특히 그는 두 번째 유배 생활을 로마에서 지낸 뒤,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서 세 번째 유배가 시작되던 356년까지 그곳에서 지내게 되는데, 이 10년 동안을 일러 「황금의 10년」이라고 부른다. 이때 아타나시오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왕성한 저술 및 사목활동을 펼쳤다.
그의 저술은 대부분 글을 쓸 때 발생한 사건들과 글을 쓰는 목적이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다. 그의 저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니체아 공의회의 신앙을 옹호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들이었다. 니체아 신경의 요지는 성부와 성자가 그 본성과 본질, 품위에서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를 옹호하기 위해 아타나시오가 최초로 쓴 작품이 세 편의 「아리우스파 반박」(Orationes contra Arianos)이다.
아리우스가 처음에 단죄됐다가 복권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아리우스파를 반박하는 변론」(Spologia contra Arianos)과 「아리우스파의 역사」(Historia Arianorum)에 묘사돼 있다. 여기서 아타나시오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을 논박하면서 니체아 신경을 제시하고 있는데, 동일한 내용이 이집트인 주교 세라피온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나타난다.
아타나시오의 일생은 한마디로 투사의 그것이었다. 부제시절부터 그는 일종의 호교 작품인 「이교인 반박」(Rratio contra gentes)과 「말씀의 강생론」(Oratio de incarnatione Verbi)을 쓰면서 우상 숭배를 논박했다.
타고난 논쟁가로 일생을 통해 열정적으로 니체아 공의회의 정통교리를 수호한 그는 특히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함께 강조함으로써 후대 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론의 완전한 기틀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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